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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양민학살사건 추모공원 방문기

작성일
2012-06-22 13:12:20
이름
박경숙
조회 :
5325
거창양민학살사건 추모공원 방문기

송악/임종범

• 1951 년 2월 9일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에서 주민 84명 학살
• 2월 10일 대현리 탄량골에서 주민 100명 학살
• 2월 11일 과정리 박산골에서 주민 517명 학살
• 2월 9일 ~ 2월 11일 기타지역에서 주민 18명학살 등
『일부 미련한 국군』에 의해 719명이 학살된 거창양민학살사건은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세 ~ 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이 60명(남자 327명, 여자 392명), 무고한 양민 719여명이 당시 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 9연대(연대장 오익경 대령), 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 병력의 총검에 무지막지하게 학살되어, 처참한 시신위에 마른 나무와 기름을 뿌려 불로 태워 버리기까지한 천인공노할 사건을 저질러 놓고 후한에 두려움을 느낀 한동석은 신원면 일원에 계엄령을 내려, 이방인 출입을 막고, 어린이 시체는 골라내어 학살 현장에서 약 2㎞ 떨어진 홍동골 계곡으로 옮겨 암매장하여 은폐를 하고, 공비와 전투를 하여 희생자가 발생된 것으로 왜곡을 하였으나, 1951년 3월 29일 거창 출신 신중목 국회의원에 의해 국회에 폭로되고, 1951년 3월 30일 국회와 내무 · 법무 · 국방부의 합동진상조사단이 구성되어 1951년 4월 7일 합동진상 조사단이 신원면 사건 현장으로 오던 중 길 안내를 맡은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은 신성모 국방 장관과 사전에 모의하여 9연대 정보 참모 최영두 소령의 수색 소대로 하여금 군인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거창읍에서 신원면으로 통하는 험준한 계곡의 길목인 수영더미재에서 합동진상조사단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해 조사를 못하고 되돌아 가게 하는 등 국방의 의무를 진 군인으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만행에 대하여....
-거창사건 관리사업소 사건일지에서 발췌-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조선 정조시대의 문인 유한준의 이 말은 유홍준교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통해서 더욱 유명해졌다.
여행길에서 또는 유적답사에서 새로운 사실을 깨우칠 때 마다 절로 감탄하게 되는 명구이다.
이번 고향방문에서도 절감케 되었으니 초등학교총동문회를 끝낸 이튿날에 거창양민학살사건 추모공원을 방문하면서다.
나는 내 고향을 얼마나 사랑하며 고향에 대해서 얼마만큼이나 알고 있는 것일까?
꼭 일 년 전, 소녀시대를 연상케 하는 아홉 분 미인후배님들의 내계와 용추계곡에서 찍은 아름다운 사진을 보고서는 귀향의 기회 때면 몇 번이나 그 골짜기를 찾게 되었다.
안의면 안심리에 생가를 둔 친구도 있고 해서 일주문과 용추폭포를 여행한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월성리 내계로 통하는 수막령이란 멋진 고개가 있는 줄은 전혀 알지를 못했었다.
이처럼 고향을 많이 알고 있는 듯하지만, 아직도 모르는 곳이 있고, 알고 있었던 곳이어도 다시 보는 고향은 늘 새롭기만 하다.
고향의 사계절을 사진이나 글로서 쉼 없이 온라인에 올려주시는 고향지킴이 온달님의 수고 덕분에 시시때때 변화하는 고향산천의 풍경들을 접할 때면 매번 감동을 받는다.
객지생활을 마감하고 남은 인생여정의 터를 고향자락에 잡으신 운곡선배님과 가래올 선배님 같은 분들도 있어, 소소한 일상이야기와 함께 고향산천의 비경을 소개하고, 선조들의 발자취가 묻어있는 문화유적의 답사기에 해박한 해설까지 곁들여 주실 때는 새로운 발견과 깨우침에 희열을 느낀다.

우리 35회 친구들은 총동문행사가 끝난 이튿날 아침, 주관기수로서 무사히 큰일을 치러 냈음을 자축하면서 당일의 일정을 의논하였다.
여러 의견들이 분분하던 중에 고향 거창 땅에 살고 있는 친구들의 ‘한번쯤은 가 볼만한 곳’이라는 강력한 추천을 따라서 ‘거창추모공원’을 방문하기로 결정을 보았다.
읍내를 중심으로 우리 북상과는 정 반대편 감악산 남쪽의 신원면을 찾아 가는 길은, 산굽이를 돌고 고개를 넘고 절벽을 끼면서 깨끗하고 아름다운 시내를 따라가는 풍치도 멋진 드라이브길이었다.
지금이야 넓혀지고 포장이 되었지만 옛날의 자갈길을 상상하면 얼마나 험준한 길이었을지 짐작이 된다.
감악산을 비롯하여, 월여산, 매봉산, 바랑산들의 준봉으로 둘러싸인 신원면은 우리 북상만큼이나, 아니 북상보다 오히려 더한 오지였다.

내 개인적으로 오래전부터 꼭 가보리라면서도 미루어만 왔던 슬픈 역사의 현장 과정리와 박산골을 찾은 때가 6월 3일 오전 11시쯤. 하늘은 눈이 부시도록 맑았고 초여름의 산하는 푸르기만 하였다.
사진으로만 여러 차례 보았었던 푸른 언덕 두기의 봉분과 정으로 흉물스럽게 쪼인 글자를 안고 쓰러져 있는 위령비!
그렇구나. 이 무덤이 바로 1951년 2월의 그 추운 겨울, 빨치산 토벌작전 견벽청야‘의 미명하에 국군들의 총탄에 무차별 학살당한 억울하고 원통한 양민들의 합동 봉분이구나.
사건현장을 감추려고 유족들의 접근까지 막았던 무도한 학살자들 때문에 유골마저 수습하지 못하고 3년간을 방치 당해야만 했던 희생자들의 주검들이 함께 묻힌 곳이로구나.
계곡에 방치되었던 유골을 수습하니 누가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 큰 뼈, 중간 뼈, 작은 뼈, 로 나누어 남과 여 소아로 구분했다는 그 무덤이로구나.
사전에 전쟁을 방지하지 못한 죄도 커거늘 전쟁이 터지자 국민과 시민을 속이고, 한강다리를 폭파시켜버리고, 대전으로 부산으로 도망갔던 무능하고 극악한 이승만정부와 자유당정권이 4.19학생혁명으로 무너지고, 민주당정권의 새로운 세상을 맞아서 1960년 11월에야 남자합동지묘109위, 여자합동지묘183위, 아이들 유골335위는 봉분도 없이 小兒合同之地(소아합동지지)라 표시만하고서 노산이은상의 추모시를 새긴 위령비를 세웠었던 곳이구나.
아~! 그러나 어찌 그리도 세상이 원통하더란 말이냐!
바로 이듬해 5월16일, 총칼을 든 군인들이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군화발로 짓밟아버리고, 그 군사쿠데타세력은 정권을 탈취한 3일 만인 5월19일에 유족회를 반국가단체로 몰아버리고, 유족대표 17명을 투옥시키고, 위령비의 글자들은 무참히 정으로 쪼아서 땅에 파묻어버리니 이것이야말로 ‘부관참시’요 억울한 영혼들을 두 번 죽이는 만행이 아니고 무엇이냐.
피멍든 가슴을 안고, 연이은 군사독재치하에서 숨죽이며 살아온 세월이 수십 년, 드디어 1987년 민주화의 거센 바람이 부니 이에 신원면 사람들도 다시 억울함을 호소하였더란다.
18년 철권통치 박정희대통령도 1979년 10월 참모의 피격에 암살당하고, 전두환소장을 위시한 신군부세력들의 정권찬탈 획책에 대한 저항운동 1980년 5월의 광주항쟁을 지켜보았고, 5공과 6공을 지나고, 문민정부 출범이후 청문회, 등을 통해 1996년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자리매김하고 피해자들의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루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지켜보면서도 억울하기만 했단다.
그 사이, 인접한 산 넘어 의령군 궁류면의 1982년 4월 26일 우범곤순경 총기 난사 사건과 그 희생자유족들에 대해 국민성금까지 거두어서 보상하는 것을 보면서 신원사람들은 더욱 원통했단다.
다른 사건들과 달리, 피해 보상은커녕 명예회복도 되지 않아, 죽고서도 여전히 빨갱이 소리를 들어야 했던 거창신원사건의 희생자와 그 유족들의 피맺힌 오랜 절규가 마침내 일말의 결실을 보았으니,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고 그로 인해 바로 건너편의 ‘거창양민학살사건추모공원’이 조성된 것이란다.

인근 동네에서 산책삼아 방문왔다는 중년의 여자 2명 외에는 아무도 없이 고즈넉한 휴일오전의 공원, 우리들 일행 20여 명은 약5만여 평에 달하는 경내를 두루 관람하였다.
공원 우측의 넓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천유문을 들어서니 희생자 719위를 모신 위패봉안각이 있어 마음이 숙연해진다.
참배단을 향하는 길엔 예술적 가치를 부여해 가신 분들의 승천과 명복을 기리는 위령탑과 상징성 있는 조형물들, 작품성을 더한 시비, 등이 푸른 녹지에 정성들인 손길이 느껴지는 조경 수목들과 잘 배치가 되어있다.
묘역참배를 마치고 나오니 역사교육관 앞에 관리사무소 직원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다.
준수한 이 젊은 청년은 반갑게도 북상면 월성리 출신이란다.
바로 이곳 관리소의 중책을 맡고 있는 우리 카페 닉네임 ‘----’ 박경숙님께서 마침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관계로 대신 마중을 나왔다는것이다.
아마도 같은 공직자인 임종호 친구와 연락이 닿았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중요한 역사의 공간을 우리 북상인들이 맡고 있다는 사실이 자랑스럽고 대견하다.
그렇다. 신원의 아픔은 우리 북상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이다. 빨치산 출신 작가 이태의 ‘남부군’에서 월성리전투와 북상지서 습격사건을 읽었다. 당시에 불타버린 북상초등학교 인근의 구면사무소 터는 오래도록 방치되어있었다. 1952년 추석날에 있었던 중산리의 빨치산 습격사건은 큰형님세대들에게는 지금도 생생한 증언을 들을 수 있다.
우리동네 중산리는 뒷동산 큰 소나무 아래와 큰도랑 건너편의 동목고개, 음지담뒤 뿔땅골 아래 등, 세 곳의 초소터가 있어 탄피는 부지기수요 사용하지 않은 실탄들까지 종종 발견되어서 장난감으로 주워 놀곤 했으니, 동네 전체가 전쟁터요 역사의 박물관이었던 셈이다.
친절한 직원의 안내와 시청각 동영상을 비롯한 박물관의 여러 자료들을 접하니 전쟁의 참상은 물론이요 토벌대와 빨치산의 틈새에서 주야로 시달렸던 양민들의 고통을 이해 할 듯하다.
관련 학술자료들과 함께 비치되어있는 도서에 눈길이 갔다.
‘태백산맥’ 못지않게 울분으로 밤을 꼬박세워가며 읽었던 ‘겨울골짜기’!
김해 출신의 작가 김원일선생께서 3년여 간 거창에서 머물며 자료를 찾아내고 청취하여, 사건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한 거창양민학살사건이야기이다.
거창출신이라면 꼭 읽기를 권하는 책이다.
안타깝게도 잡지‘뿌리깊은 나무’가 보이지 않는다.
최초로 한글가로쓰기를 했던 70년대 유신정권시절에 창간하고 80년대 신군부정권시절 폐간된 월간 잡지로서 거창사건을 심층으로 파헤치며 몇 개월에 걸쳐서 시리즈로 다루었었다.

박물관 입구에 어린이용 방명록을 비치하고, 입체적인 미니어처사건현장모형들은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관심과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울진 삼척지구 침입의 무장공비들이 계방산 외딴집 일가족 참살 때에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치며 죽었다는 이승복 어린이의 이야기 같은, 거짓교육은 그만 하고 사실을 사실대로 가르치는 참 교육이 되어야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고 했다.
근간에 다시 5.16쿠데타를 찬양하고 12.12를 구국행위라고 왜곡하는 유신과 신군부의 그림자들이 어른거린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것은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한때는 활발했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 같은 기구의 활동을 다시 들여다보면 한숨만 나온다.
진실을 밝히고, 잘못은 용서를 구하고, 과거를 정리하여 화해의 세상을 함께 꾸미는 것은 그렇게나 힘든 일일까?
가을국화축제 등, 다채로운 행사로 방문객을 늘리고, 공원에 활기를 불어넣는 관리사무소의 노력은 훌륭한 사업이다.
산자와 죽은자가 함께 하는 공간! 용서를 빌고 화해를 하고, 아픔을 치유하고 승화시키는 일은 남은 우리들의 숙제다.
한번쯤은 와 볼만한 곳이 아니라 꼭 한번은 와 보아야 할 공원을 나오면서 거창친구들에게 물어보았다.
"가을 국화축제때에 몇만 명 단위의 사람들이 온다던데 사실인가?"
"그럼, 이 골짜기 전체에 국화향기와 사람향기가 가득 넘친다네. 가을에 꼭 다시 들르게."

6월은 호국보훈의 달!
다시 한국전쟁 62주년을 맞으며 전쟁의 비극과 평화의 소중함을 새삼 깨닫는다.
호국영령들과 전쟁의 참화에 희생당하신 모든 분들의 명복을 빈다.

** 거창사건과 추모공원에 대하여 그 어떤 말보다 진한 감동이 느껴지는 방문기를 글쓴이 송악님의 허락을 얻어 게시 합니다. 거창사건관리사업소 관리담당 박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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