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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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의 자녀들은 어떻게 효도를 했습니까?

옛날에는 현대인들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삼강오륜을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윤리를 잘 실천하는 것을 무엇보다도 가치롭게 생각했고, 그 예절을 실천하는 근본이 효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님 봉양을 남다른 정성으로 실천했습니다.

그 실천 방법은 평소 생활하면서 부모님의 뜻에 순종하며 마음이 편안하도록 받들어드리고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 드리기에 힘썼습니다. 부모님이 병이 나면 특별한 노력으로 음식을 마련하여 간호를 하면서 접시에 환자의 똥을 받아서 맛을 보거나 민간요법으로 지성을 다하여 치료하기에 힘썼습니다. 어떤 효자는 자기 허벅지 살을 베어 약으로 달여드리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소생시키기도 했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무덤 곁에 움막을 짓고 3년동안 시묘를 했으니, 이 모든 것이 자신을 낳아 길러주신 은혜에 대한 보답이었습니다.

오늘날은 반드시 옛날과 같은 방법으로 효도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이처럼 부모님을 사랑하고 받드는 지극한 정신을 이어받아 나름대로 현실에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 문안을 하지 못할 거리에 있는 사람이라면 전화로 문안을 드릴 수도 있을 것이고, 부모님께서 병이 나면 병원에서 지극한 마음으로 간호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옛날의 부인들은 어떻게 열행을 실천했습니까?

부인이 남편을 위해 열렬한 마음을 드러내는 행실을 열행이라고 합니다. 우리 고장의 조상들은 정조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항거하다 자결하거나 살해된 분들이 많았습니다. 또 남편이 죽으면 남편을 따랄 죽은 분도 있고, 수절을 하며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리며 가업을 훌륭히 계승토록 한분도 있었습니다. 남편이 병이 났을 때 허벅지 살을 베어 약으로 해 드리거나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이기도 했고, 그 밖의 지극한 정성으로 시부모와 남편을 봉양하고 공경하였습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일지라도 옛날 조상들의 이런 정신을 이어받아 새로운 방법으로 가정의 화목과 부부의 사랑을 이어가는 태도가 필요할 것입니다. 특히 청소년들은 서구 문화풍조를 따라 흉내내기에 급급하기보다는 내가 누구인지를 알고 우리 문화와 우리 정신을 계승하는데 힘쓰는 것이 진정한 거창인이고 한국인일 것입니다.

정려란 무엇입니까?

정려는 쉽게 말해서 효자문이나 열녀문을 말한 것으로 정문이라고도 합니다. 효행이나 열행이 뛰어난 사람이 있으면 나라에서 그 행실을 기리기 위해 마을 입구에 정려를 세워 효시를 해두고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하고 본받도록 하였습니다. 효자비 열녀비란 정려를 하지 않는 요즘에 아서 생긴 것입니다.

정려는 어떤 형태입니까?

조선 증종 때 간행된 속삼강행실도를 보면 정려의 형태는 홍상문처럼 마을 입구에 큰 나무 기둥을 두 개 세우고 그 윗 부분에 두 개의 문지방을 가로 끼워 그 사이에 세로로 붉은 홍살의 나무를 박아 둔 형태입니다. 이런 형태는 오늘날 향교나 충신 홍살문 등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광해조에 간행된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는 이런 정려를 대문 앞이나 대문 곁에 세웠습니다. 거창에 남아있는 정려 중에 오래된 것은 명종 때 정려를 받는 북상의 임훈과 임운의 정려로 대문안에 세워져 있고 후대로 오면서 기와르 얹은 작은 목조정려와 돌 지붕을 한가첨석을 얹은 석조정려가 있습니다. 요즘은 사적비나 효행비 열행비등의 비석형태로 남기고 있습니다.

정려의 청원과 결정은 어떻게 했습니까?

먼저 마을의 유사가 마을 사람들의 여론을 듣고 선비들의 연명으로 정려 주청 단자를 작성하여 그 지방 향교로 통문을 보내거나 고을 수령에게 청원 단자를 올리면 향교나 수령은 사실 확인과 논의를 고쳐 도의 감사에게 보고하고, 감사는 예조에 다시 보고하여 정려를 청원합니다. 예조에서는 다시 판단하여 임금께 아뢰면 임금이 결정학, 예조에서 허가서 격인 입안을 작성하여 도의 관찰사에게 관첩(공문)을 써서 결정 내용과 지시사항을 내려보냅니다. 관찰사는 감결이란 공문을 보내 지방 수령에게 내용을 알리고 지시사항을 전달했습니다. 수령은 다시 전령을 보내 그 마을의 동수에게 시행할 내용을 통보하였고, 그 내용은 대개 정려 건립시 경비 부담을 관청에게 하도록 하고, 잡역과 세금을 면제 하도록 했습니다. 그밖에 백성이 직접 감사에게 정렬를 청원하는 경로와 암행어사를 통해서 예조로 청원하는 경로가 있었는데 앞의 경우와 같이 결정되고 하달되었습니다. 한일합방이 되고 난 후에는 이일을 담당한 조정이 없어져서 전직 고관들이 중심이 되어 서울에 유림향약본소를 세웠는데 그 체계는 도약장, 약장, 사무약장, 별우사, 8도의 도유사를 두었습니다. 전국에서 올라오는 청원장을 살펴 포창완의 문을 지어주고 후손들이 직접 비를 세우게 했습니다.

거창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 효자는 누구입니까?

안음현(위천)의 반전입니다. 고려 우왕 14년(388)의 반전입니다. 고려 우왕 14년(388)에 왜구가 쳐들어와 그의 아버지를 잡았을 때 반전은 은덩어리와 은띠를 갖고 적에게 가서 아버지와 바꾸기를 간청하여 아버지를 구출해 왔습니다. 반전에 관한 기록이 고려사 열전 34권 효우편 반전기와 동국신속삼강행실 효자도 1권에 나와 있으며 장풍 근처 바위에 '효자 반전 구거 동문(孝子 潘琠 舊居 洞門)'이란 음각 글씨가 바위에 있다고 안의읍지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창에서 가장 먼저 드러난 열녀는 누구입니까?

거창읍 절부리의 탐진 최씨입니다. 거창부 여지승람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습니다. "열녀 고려 최씨는 낭장 김순의 아내다. 흥무 경신년(380) 7월에 왜구가 거창현을 노략질하고 최씨를 붙잡아 욕보이려 하였다, 최씨는 굳이 항거하며 따르지 않고 죽었으니, 그 마을을 '절부리'라 하였다." 또 김영선의 정려기에는 왜구가 노략질을 하여 최씨의 집에 들어와 부인을 욕보이려고 유방을 잡으니, 절부가 칼로 유방을 잘라 땅에 던지며 꾸짓고 굳게 항거하다 혹독하게 죽었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서구 풍조로 변해 버린 성도덕을 볼 때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린 조상의 행실 앞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집니다.

거창의 효열

박문진은 몽석의 밀양인 아버지가 병이 나서 4년동안 자리에 눕자 항상 곁에서 간병을 하였고 의원이 호랑이 뼈 기름이 좋다고 하자 늘 목욕하고 기도하니, 어느날 호랑이가 함정에 빠져있어 잡아다가 약으로 해 드리고 아버지의 병을 고쳤습니다. 1893년 고종 때 정려를 내렸고 1898년 띠밭마에 정려를 세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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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055-940-3413)
최종수정일
2015-02-01 0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