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의 뜻을 살펴보면, 마리란 머리 수의 옛 명사로서 으뜸 혹은 높음의 뜻이다. 이러한 의미의 마리를 한자문화 도입과 함께 그대호 취음하여 한문으로 표기한 것이 마리이다. 고대에 위세와 권세로 상징되는 말을 이용한 중추세력의 존재를 암시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는 말흘리 고분에서 말재갈과 재갈멈치 등이 출토된 사례와 함께 지금도 지동 마을 뒤에는 말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느 커다란 봉토분이 있어 이와 관련되고 있다.

마리라는 지명이 삼국사기에서 이안현은 본래 마리현이다. 경덕왕이 이를 개명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통일신라시대 이전부터 칭명되어온 명칭임을 알 수 있다. AD 5세기 경부터 이 고장 토착세력으로서의 말흘리 고분 축조집단이 염례국을 건설하고 6세기 중엽까지 웅거해 있었다. 그러나 염례국은 대가야에 562년 멸망하고, 그 잔여 세력은 기백산 남단의 큰 마을 고학리 일대에 그 법통을 계승할 수 있는 집단이었기에 마리 '머리(首)'로 호칭하여 우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가 이 고장을 처음 수중에 넣게 된 시기는 AD 562년이다. 즉 대가야가 진흥왕에 의해 멸망됨으로써 후기가야연맹의 한 세력이던 자타(거창), 염례(마리)도 함께 신라에 타멸되었다. 이로 미루어 신라 진흥왕 26년 경부터 행정명칭으로 사용하였고, 마리 현기는 지금의 고학리 일대에 위치하였으며, 그 주도세력은 옛 염례국의 잔여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마리면의 연혁

조선고종 32년(1895년)에 제현을 모두 군으로 고칠때 안의군 동리면(영승리, 율리, 월계리, 말흘리)과 남리면(고학리, 대동리, 하고리)으로 나뉘어 있었다.

  • 1914년 3월 1일 일제에 의한 시군 통합 시 안의군을 폐지하고 동리면과 남리면을 합쳐 마리면으로 칭하고, 거창군에 편입되었다.
  • 1982년 2월 15일 거창읍 송정리 일부가 행정구역 개편으로 하고리와 합해 마리면으로 이속되었다.
  • 면사무소는 1914년 이후로 월계리 222번지(영신마을 소재)에 위치해 오다가 해방 이후 1948년 1월 12일 면의 중앙지인 말흘리 247~4번지에 이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존성제(存誠齊)

경남 거창군 마리면 율리는 마리면의 북동쪽에 위치하여 위천면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뒤로는 취우령이 북에서 남으로 길게 뻗어 내리고 앞으로는 위천수가 흐르는 사이에 있다. 율리는 풍계, 장풍, 상율, 도동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어음골과 학서림. 크고 작은 소와 하얀 조약돌이 깔린 냇물은 한 폭의 풍경화를 보는 듯하다. 구 읍지에 따르면 옛부터 이곳에는 율도가 있었다 한다. 위천천의 퇴적층을 섬이라 일컫는 것으로 장풍의 대섬(진동암쪽), 밤섬(학서림), 조개섬(원영승 북 안갱이들) 등이 윗밤섬, 아랫밤섬으로 불렸던 栗島이다. 율리라는 명칭도 이에서 유래된 것이다.

사이율은 유배 온 선비가 이곳에 머물러 살면서 재선, 밤섬, 조개섬 등 세 섬을 보고 유배 온 자는 섬에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밤섬이라 이름하고 살았다는 연유에서 밤섬이라 하고, 왜정 때 상율로 개명했다.

상율 소류지는 1949년에 조성된 소류지이다. 당초 풍계에 소류지를 파려 하였으나 마땅찮아 상율에 팠다. 밤섬의 이름에서 섬 주변에 물이 있어야 하므로 큰 소류지를 파게 되었다. 우막 김성재의 서당이 상율에 소재하고, 그의 자손들이 세우고 뜻을 기리는 사당이 있다.

화림지(在上栗里 寓幕金聖載 子孫營建 - 花林誌)

장풍에는 조선시대 역원이 있던 곳으로 안의 반낙원 - 고학 쌀다리 - 창촌 너들다리 - 장풍원 - 고제 높은다리 - 한양으로 통하던 길목이다. 이곳까지 온 길손들은 앞 냇물을 건너기 위해 잠시 머물러야 했으므로 주막거리가 형성되었으나 현재는 두 가구만 남아 있고, 여관이 들어섰다.

학서림(鶴捿林)

풍계(風鷄)앞 냇물 위천천 중앙에 놓여 있는 소나무 숲이다. 옛날 물레방아 갱변이라 불리던 곳으로 지금도 숲 아래쪽에 물래방아를 설치하였던 흔적이 남아 있으며, 오늘날 장풍숲이라 불려지고 있다. 진양 강씨 유암 강박(姜璞)선생이 손수 나무를 심고 가꾸면서 즐겨 찾아 읊조리던 곳이었다. 풍계 마을앞에 하얗게 깔린 자갈과 맑은 냇물 그리고 뛰노는 물고기가 어울려 그 풍광이 자못 아름다운 곳이다. 조선 선조때 선비 정온(鄭蘊) 선생은 장풍의 풍광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찬 진눈깨비 휘날리고 앞산 운무는 마을을 연기처럼 뒤덮는구나.
고기잡는 늙은이는 옷젖는 줄도 모르는가?
한가로이 움막에 기대어 백로와 더불어 눈 꽃을 보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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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055-940-3413)
최종수정일
2016-10-11 13:5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