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읍은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거창군, 거창현, 거창부의 치소(治所)가 있어온 본 군의 행정, 교육, 교통, 경제의 중심지로서 여러 가지 관청, 학교, 기관단체들이 모여 있다.
거창읍은 상림리·중앙리·대동리·김천리·대평리·정장리·장팔리·송정리·서변리·동변리·학리·양평리·가지리 등 13개 리 37개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1914년부터 천내(川內) 제 1 교 서북부를 상동(上洞)이라 하였는데 1988년 8월 1일 상림리로 개칭, 상동(上洞)과 원상동(元上洞)으로 나누며, 옛날은 천내방(川內坊)에 딸았다.
거창군의 관공서가 집중되어 있으며 거창군청, 거창군의회, 거창읍사무소, 거창경찰서, 거창세무서, 거창우체국, KT거창지점, 한국 농어촌공사 거창·함양지사, 거창적십자병원, 아림초등학교, 거창혜성여자중학교, 거창대성고등학교 등이 자리하고 있다.
옛날 천내방으로 내안 또는 웃내안으로 부르고 있다. 북서쪽 500여 미터 지점에는 원상동에 부속된 미륵댕이라는 작은 마을이 있다.
거창읍의 중심지로서 하동(下洞)이라 하다가 1988년 8월부터 중앙리라 하였다. 하동(下洞)과 죽전(竹田) 두 마을로 이루어졌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천내 제1교와 아림로(娥林路)의 동쪽을 하동이라 하였으며 거창의 중심지이다. 거창초등학교, 거창군 종합사회복지관 등의 기관과 거창군농업협동조합, 국민은행, 경남은행, 거창상설 시장, 거창기독교회 등이 자리하고 있다.
거창읍 천내 가장 동쪽에 있고 옛날 동부방(東部坊)에 따랐으므로 동동(東洞)이라 하였다가 1988년 8월 1일 대동리로 고쳤으며, 동동(東洞), 강양(江陽), 개봉(開封), 동산(東山) 4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동부방(東部坊)이 있던 곳이므로 일명 동부(東阜)라고도 한다. 거창중학교, 창동초등학교가 있다.
영천(瀯川) 강가의 양지바른 곳이라 하여 (江陽, 溪陽) 개양이라 부른다.
가야고분이 마을 뒷산에 있으므로 뫼가 있는 골짝이라 하여 뫼실로 부르다가 묵실로 바뀌어졌는데 개봉은 뫼를 처음 썼다는 뜻이기도 하다. 거창 신씨의 옛 중국 고향 지명 개봉부(開封府)에서 유래되었다고도 하며 옛날은 가을지방의 묵곡리(加乙旨坊 墨谷里)라 하였다.
웅고에서 내려오는 개울 물에 녹물이 내려 오므로 쇠빛내 또는 쇠비내 김천동(金川洞)이라 하였고, 또 옛날 소옹(蘇翁) 같은 사람이 살았으므로 내 이름을 소부천(蘇父川)이라 하였던 것이 소붓내 쇠붓내 쇠비내로 바뀌었다고도 한다. 냇물의 서쪽을 웃쇠비내 동쪽을 아랫쇠비내라고 한다.
옛날 천외방 중리라 하였고 중동이라 하다가 1988년 8월부터 대평리라 한다. 거창읍의 동남녘 한들에 자리하므로 대평리라 하고 중동과 들성(坪城)으로 나뉜다.
마을 가운데 동서로 가로 지르는 도로 남쪽을 앞담이라고도 한다. 창남초등학교, 거창소방서, 시외버스합동주차장, 한국전력거창지점, 천주교회 등이 자리한다.
서기 645년 김유신장군이 백제군 2천명을 섬멸했던 신라성 매리포성(賣利浦城)으로 추측하고 있다. 왜란 때 명나라 장수 유정·이령·조승훈·갈봉하(劉綎·李寧·祖承訓·葛逢夏) 등이 한때 머물었던 곳이라 한다.
"웃내밖(上川外)"이라고 부르고 있다. 송정, 운정, 절부(松亭, 雲亭, 節婦) 3마을이 있다.
옛날에 반송(盤松)이 있어서 솔뚜백이 또는 솔지이라 하였다.
마을 북쪽의 앞들은 구릉논(低濕畓)이 많아서 구릉지이가 구름지이로 바뀌었다.
고려 홍무란(洪武亂) 때 왜적에게 절개를 지켜 순절한 탐진 최씨(耽津 崔氏)로 말미암아 마을 이름을 절부리라 하였는데, 달리 제불이라고도 한다. 마을 어귀에 절부지리(節婦之里)라는 비가 있다. 일정 때 정려를 없애고 덕곡(德谷)으로 고쳤다가 광복후에 되찾았다.
장팔리와 송정리 사이에 바위 8개가 있는데 그 정기를 타고 8장사나 8문장이 난다 하여 장팔리(將八里) 또는 장팔리(長髮里)라고 기록된 일도 있다. 장팔(章八)·중산(中山)·웅곡(熊谷) 등 3개 자연마을을 이루고 있다.
동사무소가 있는 가운뎃담을 기준으로 북쪽 300여 미터 되는 곳에 아랫담과 남쪽 500여 미터 되는 곳에 웃담 남서쪽 1.5 킬로미터 쯤에 웃장팔(골장팔리)의 4개 마을이 있다.
옛날부터 중뫼라 하고 근래"중사이"라고도 부른다.
마을 뒷산에 웅장(熊掌)설이라는 명당자리가 있어서 곰실이라고 한다. 조선 세조(世祖)때 영천이씨가 들어와서 마을을 이루었다. 1965년 3월 11일 분 불이 나서 47채의 집이 타버렸으나 사람은 다치지 않았다.
조선초에 장원(莊園)을 두고 농소(農所)를 설치하여 나라에서 관리함으로서 생긴 이름이라하며 정장(正莊) 국농소(國農所) 2개 마을로 나누어져 있다.
동사무소가 있는 정장마을과 남쪽 500여 미터에 소래실, 서쪽 800여 미터에 상살미 등 3개 자연마을로 이루어졌다.
조선 성종대왕(成宗大王)이 제 4자 완원군(完原君)의 5대손 승의랑 이유길(承義郞 李惟吉)이 은거한 곳이다. 그의 아버지 대사헌 위(大司憲 瑋)가 1592년 임란 때 전사하고 그 후손이 살게 되었으므로 나라에서 낙향귀농(落鄕歸農) 한 곳이라고 하여 국농소라 이름 지었다. 달리 "국노실"이라고도 한다.
원서변 마을과 원동변 마을 사이의 냇물인 모곡천(毛谷川)은 본시 원동변 마을서쪽 끝에서 남동쪽 사지마을을 거쳐 양평마을 앞에서 아월천에 합류해다. 이 모곡천이 범람하면 수해가 심하므로 직강공사를 하여 지금과 같이 동쪽으로 바로 흐르게 하였다고 하며, 옛날에는 모곡천의 동쪽에 원동변 마을이, 서쪽에는 원서변 마을이 자리했으므로 동변리·서변리로 나누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강물이 남쪽으로 흐르는 것으로 하여 그 상류를 북으로 삼아서 동, 서를 나누었다고도 한다. 원서변(元西邊), 사지(沙旨), 사동(沙洞), 원동(院洞)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서변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월천초등학교, 거창농협월천지점 등이 있고, 옛 읍외면과 월천면사무소 소재지였다. 근래 원서변 마을도 "모곡"·"모찔"로 부르고 있다. 약 500년 전에 남하면 지산에서 해주 오씨가 옮겨와서 살기 시작했다고 한다. 마을 서남쪽 낮은 산 사이에 영산(靈山)골·흰비선골·집골·샛골·밭골·장삿골·자지능골 같은 작은 골짜기가 있었고 그 사이를 넘나드는 막재·달성고개 같은 잿길이 있다. 마을의 서쪽에 애머리밭들 서남쪽에 대한(大旱)들 남쪽으로는 부치기들이 있고 동쪽에는 번답들 동남에는 굴평들·검은들이 있다.
마을 서북 1킬로미터 산골짜기에 분청사기를 굽던 가마터가 있어서 "사기막골"이라 하였다. 1800년께 선산 김치구(善山 金致九)가 모곡(원동변마을)에서 옮겨살게 되었고, 밀양 변씨도 가지리에서 함께 옮겨 오게 되어 두 성씨의 집성촌이 되었다. 한말 모곡방사촌(沙村)이었고, 1914년 읍외면 동변리(東邊里)에 속했다가 1937년 월천면 서변리에 따르게 되었다.
옛날 사마(司馬) 벼슬을 한 사람이 있었다 하여 사마리라 한다. 한말까지 음석방(陰石坊)에 속했으며 1914년 서변리(西邊里)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 숙종(朝鮮 肅宗)때 (1675 ~ 1720) 세운 용원서원(龍源書院)이 있었던 곳이므로 서원마라 불리며 모곡방 용원서원리(毛谷坊 龍源書院里)였던 곳이다. 마을 뒤의 산세가 나팔 같고, 나팔의 앞을 막으면 아니된다 하여 집집마다 사립문을 달지 않았다는 전설이 있다.
건흥산에서 내려와 원동변과 원서변 두 마을 사이를 남동남으로 사지마을을 향해 흘러서 양평 앞에서 아월천에 합류하던 모곡천(毛谷川)의 동쪽에 자리하므로 동변리라 했다. 원동변·죽동(竹洞)·구산(九山)등 3개 마을로 이루어 졌다.
동변리에서 가장 큰 마을로 큰마라고 한다. 한말 모곡방 때와 일정초기 읍외면 때 면 소재지 마을이었다. 본시 이 마을을 모곡(茅谷) 모찔이라 불렀다.
마을에 대나무 숲이 있다하여 이름되었고 서쪽으로 300여 미터 쯤에 담안 이란 마을이 있다. 마을 주위에 돌담이 많아 이름되었다.
마을 700여 미터 남쪽에 있는 산 이름을 따라 구산(龜山)이라 부르다가 곁에 있는 아홉골(九曲·九山)에 연유하여 구산이라 한다.
조선 때는 음석방(陰石坊)에 속했으며 학동, 의동, 구례 (鶴洞, 薏洞, 九禮) 등 3개 마을을 이루고 있다.
고제에서 내려오는 완계(浣溪)와 웅양에서 내려오는 미수(渼水) 두 물이 어울리고 그 사이에 세 산이 있어서 ‘三山二水’ 신선이 사는 경치 좋은 곳이라하여 원학동(猿鶴洞) 원학골이라 한다. 400여년 전에 청주한씨가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내학·외학·장성골 등 세 마을이 있다.
마을 뒷산의 정기로 9정승이 날 곳이라는 풍수설에 따라서 이름지었다 한다. 골구례·밑담·점담 등으로 이루어졌다.
원래는 지금 마을의 북동쪽 1킬로미터 위에 있었으나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 선산 김우봉(善山 金羽鳳)이 영조 때인 1770년게 지금 자리로 옮겼다. 남서남으로 트인 말발굽모양의 작은 분지로서, 마을 어귀 남쪽은 뱀의 머리 모양이고 북쪽에는 자라목 모양의 날이 10여칸을 사이에 두고 맞대어 마을을 드나드는 길목을 이룬 구사합문(龜蛇合門)의 명당 자리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음석방(陰石坊)이였으며 양평, 당동, 노혜, 김용(陽坪, 堂洞, 老惠, 金龍) 등 4개 마을이 있다.
마을 앞에 큰 돌이 서 있어서 돌 그늘이 마을까지 이르렀는데 그 돌을 음석(陰石)이라 하고 지명도 음석방이라 하였다. 음석 그늘돌이라는 것이 거널들·가너들로 변하여 세평(細坪)이라고도 썼다. 세종조에 거창 신씨의 선조 신언(愼言)이 개화리에서 옮겨옴으로써 마을이 되었다. 조선 중기에 음석을 없애고 '그늘음'자가 좋지않다하여 '볕양(陽)'자로, '돌석(石)'자를 '들평(坪)'자로 바뀌어서 양평이라 하였고, 조선말까지 음석면(陰石面)의 소재지였다.
마을 북동쪽으로 높이 872미터의 금귀봉이 있는데 옛날 봉화산으로 봉수대의 수비꾼이 거처하던 당이 있어서 땅골 또는 봉우땅골로 불리며 아랫땅골(下堂洞) 웃땅골(上堂洞)등 2개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약 400여년 전 중종 때에 창녕성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동부방 노혜리(東部坊 老惠里)였다. 마을 가운데 누에 모양으로 생긴 낮은 산이 길게 뻗어 나와 누에들 또는 뉘들이라 하고, 큰 길을 가로 질러 논밭에 물을 대는 큰 홈통이 있었으므로 홈거리라 하고 노혜사(老惠寺)가 있었다고도 한다.
옛날 마을 앞 황강 냇물에서 사금이 나왔고 용이 놀았다는 용소(龍沼)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조선 숙종 때 경주 최씨가 마을을 세웠다고 한다.
뒷산이 칡덩쿨 같이 생겼다 하여 "갈(葛)마을", 일설에는 거열성에서 신라와 백제가 싸울 때 싸움터에서 달리던 말이 목이 말라 죽은 곳이라 하여 "갈마리(渴馬里)"가 되었다고도 한다. 고려 충열왕(忠烈王 1270~1300) 때 동정 신원간(同正 愼元幹)이 개성으로부터 외가인 유씨(劉氏)를 찾아와 갈지에서 개척하였다고도 한다. 조선시대에는 갈지방(加乙旨坊)이었고 개화, 중촌, 갈지, 교촌(開花, 中村, 葛旨, 校村) 등 4개 마을이었다.
칡의 가지가 지내마을에서 생겨 이 곳에서 꽃이 핀다고 하여 이름되었다. 500여년 전 문화 유씨(文化 柳氏)가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마을 북녘에는 비석골, 북서쪽에는 거리골, 버섯나무골, 생이동골이 있다.
가지리(加旨里) 4개 마을에서 가운데 자리하였다고 하여 이름되었다.
칡덩쿨의 뿌리에 속한다 하여 이름되었고 웃갈마리라고도 한다. 500여년 전에 만호벼슬을 지낸 인동장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전한다.
마을에 향교가 있다고 교촌이라 하며 조선시대에는 향교동리(鄕校洞里)라고 하였다. 흔히 향교라고 한다. 지금은 거창중앙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