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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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면(南上面)

본면은 거창읍의 남쪽에 맞닿아 있으며, 조선시대에는 북서부에 청림방(靑林坊)이라 하여 한산리, 지하동리, 송변리, 청렴리 등 4개 리가 있었다. 남서부에 고천방(古川坊)이라 하여 무촌역리, 매산리, 동령리, 진목정리 등 4개 리가 있었으며, 남동부에는 남흥방(南興坊)을 두어 남흥리, 율정리, 사불랑리(沙佛郞里), 북죽리, 남불리 등 5개 리로 나뉘었던 것이 지금은 둔동리, 오계리, 무촌리, 송변리, 대산리, 월평리, 전척리, 임불리, 진목리, 춘전리 등 10개 리로 이루어졌다.

둔동리(屯洞里)

남진, 동령, 신기, 원둔동 등 4개 마을로 이루어졌다. 둔동리는 원둔동 마을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 남진(南眞) : 마을 가에 참나무가 많아서 "진목지"라고 하다가 1973년 7월 함양군 안의면에서 진목리가 본면으로 들어온 뒤로 진목의 남쪽에 자리하므로 남진이라 한다.
  • 동령(東嶺) : 마을 뒤의 관술령 줄기가 남쪽으로 달리다가 이곳에서 동쪽으로 뻗는 곳에 마을이 자리하므로 이름 되었고 동용골(東龍谷)이라고도 하며 200여년전에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 신기(新基) : 100여년전 둔동 마을에서 떨어져 나와 밭들에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터라고 한다.
  • 원둔동(元屯洞) : 마을 뒷산에 옥등잔에 불을 켜서 걸어 놓은 설의 명당자리가 있다는 풍수설에 따라 마을이 등불에 해당 하므로 등골(燈洞)이라 하며 등자를 둔자로 바꾸었다.

오계리(五溪里)

옛 고천방에 따랐었고, 원오계 마을 이름에서 오계리 이름이 생겼다. 외등, 묵동, 원오계, 갈전 등 4개 마을이 있다.

  • 외등(外燈) : 둔동리 원둔동을 등골 이라 할 때 "바깥등골"이라 하였다.
  • 묵동(墨洞) : 옛날 먹을 만들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 원오계(元五溪) : 마을 남쪽에 솟은 대령산(719미터)의 다섯 골짜기가 마을을 향해 틔어 있으므로 오계라 하며 마을 앞의 외기들 이름을 따라서 마을을 "외기촌" 이라고 한다.
  • 갈전(葛田) : 1936년 명자년 수해때 이웃 덕평(德坪)에서 옮겨 옴으로써 마을이 되었다.

무촌리(茂村里)

조선시대 본면의 서남쪽에 자리했던 고천방에 있었던 무촌역을 중심으로 한 근방을 무촌역리라 한데서 리동 이름이 생겼다. 상매, 하매, 무촌, 인평, 성지, 지하 등 6마을이 있다.

  • 상매(上梅) : 마을 남서남쪽 3킬로미터에 있는 감악산 북동 어귀에 있는 매산(梅山)마을 윗담이다.
  • 하매(下梅) : 매화꽃이 땅에 떨어진 명당자리(梅花落地說)가 있다는 풍수설에 따라 매산이라 하고 뒷산이 말과 같이 생겼으므로 마산(馬山)이라고도 하다가 윗매산이 분리되자 하매라 하게 되었다.
  • 무촌(茂村) : 마을이 크고 붐볐으며 숲도 무성했으므로 이름 되었다.
  • 인평(印坪) : 마을 모양이 도장과 같이 생겼다하여 인평, 밭 가운데 자리함으로 밭듭이라고 부른다.
  • 성지(聖旨) : 마을 터가 좋아서 많은 어진 사람들이 날 것이라는 한 도승의 말에 따라 이름 지었다 하고, 성조동(聖祚洞)이라고도 썻으며, "성짓골"이라고 부른다.
  • 지하동(池荷洞) : 옛날 청림방에 따랐던 마을이다. 조선 초기에 마을 앞들에 진양 허씨가 살면서 많은 급제가 났으며 그때는 천화동(天火洞)이라 하였다. 마을 터가 못 위에 뜬 연꽃(連花浮沼)과 같다 하여 못지, 연꽃하, 지하동이라 한다.

송변리(松邊里)

청림방에 따랐던 마을이다. 솔숲이 울창하여 이름되었다고도 한다. 고려말 거제현이 가조에 옮겨와서 거제에 있어던 속현의 이름을 따라 송변현(松邊縣)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영조 36년(1760)에 만든 거창부여지승람에 고적 아주촌(古跡 鵝州村)이라는 제목 아래 잔글로 "거제가 가조에 와 있으면서 본 섬안에 있었던 속현과 역원을 가조 땅에 두었는데 아주현은 거창부의 동쪽 심리에 두고, 송변현은 무촌역 남쪽 오리에, 오양역(烏壤驛)도 가조의 서쪽에 있었으니 지금도 사람들이 그렇게 일컫는다."라고 적혀있다.

대산리(大山里)

조선시대 청림방에 따랐고, 대현 마을의 대자와 한산 마을의 산자를 따서 대산리라 하였다. 괴화, 이인, 한산, 가곡, 대현 등 5마을이 있다.

  • 괴화(槐花) : 괴화나무가 있으므로 생긴 이름이고, 앞내 대산천(大山川)이 바다처럼 고여 있고, 마을이 정자 같아서 해정(海亭), 해지이라고도 한다.
  • 이인(里仁) : 조선 초기에 생긴 마을이라 하며 많은 선비들이 모이던 어진 마을이라 하여 이름되었다. 마을 가에 푸른 숲이 있어 청림 (靑林) 이라고도 한다.
  • 한산(寒山) : 마을이 산을 지고 북향으로 자리잡고 있어 겨울에 눈이 오래까지 녹지 않아 이름 되었다고, 마을 뒷산에 좋은 차가운 물이 샘솟으므로 이름하였다고 한다.
  • 가곡(佳谷) : 옛날 기와집이 많아서 좋은 곳이라는 뜻에서 가곡이라 하고 가얏골 이라고 부른다. 마을 언저리에서 가야 토기가 많이 나왔다고 한다.
  • 대현(大峴) : 마을 북동쪽 어귀에 있는 고개길을 한대고개 라고 한 것이 마을 이름이 되어 한대곡 이라 하며, 조선 초부터 생긴 마을이라 한다.

월평리(月坪里)

마을 뒷산인 낙하산이 반달 모양이고, 앞에 넓은 우암들이 있으므로 월평 이라 한다. 옛 남흥방에 따랐으므로 남흥이라고도 하였다. 월평과 평촌 두 마을이 있다.

  • 월평(月坪)
  • 평촌(坪村) : 우암들 가운데 자리하여 황강 건너 무덤실과 마주 보고 있으므로 들무덤실 이라고 부른다.

전척리(剪尺里)

전척, 괘리, 명산동, 고척 등 4마을이 있다.

  • 전척(剪尺) : 옛날 이 마을에 척법(尺法)을 가르치는 서당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라 하며, 전자불 이라 부르고 전척(典尺)이라고 썼다.
  • 괘리(掛履) : 임진왜란때 마을 앞 냇가 나무에다 많은 집신을 걸어 놓고 위장하여 적의 침입을 막았다하여 "신거리"라고 한다. 합천댐 공사로 옛 마을은 없어지고 지금은 길위 높은 곳으로 옮겼다.
  • 명산동(名山洞) : 마을 뒷골짜기에 마른 나무에 꽃이 핀다는 고목생화(枯木生花)명당이 있다는 풍수설에 따라 마을 이름도 "명산골"이라 한다.
  • 고척(古尺) : 마을 근처에 금상옥척(金箱玉尺)이라는 명당 자리가 있다하여 고척, 또는 고자실이라 한다.

임불리(壬佛里)

옛날 남흥방에 따랐고, 본면의 동쪽끝에 자리하여 북쪽은 황강으로 남하면과 경계하고, 동쪽은 합천군 봉산면, 남쪽은 신원면에 맞닿는다. 임불, 남불, 월포, 세 마을이 있다.

  • 임불(壬佛) : 북쪽 임방(壬方)에 새벽에 스님이 부처에게 예를 드리는 명당터가 있다는 풍수설에 따라 이름이 지어졌다 하고, 옛날 사불랑리(沙佛郞里) "사부래이"라고 하였다.
  • 남불(南佛) : 예 남흥방에 따랐었고 남평(南坪)이라고도 하였다.
  • 월포(月浦) : 마을은 초생달 같고, 마을앞에 황강물에 접하므로 월포라 하고, 예전에는 마을 뒤에 대밥이 있어 뒷대 또는 북죽(北竹)이라고도 하였다.

춘전리(春田里)

임진왜란때 엄능(嚴陵)이라 하다가 뒤에 지금의 내춘을 중심으로 엄전(嚴田)이라 하여 "음지이"라고 부른다. 안의현의 황곡리(黃谷里)에 따랐었고, 안의면에 속하게 되어서 밭이 많은 곳이라 춘전이라 했다하며, 1973년에 남상면에 붙였다. 남영, 내춘, 외춘, 교동 등 4마을이 있다.

  • 남영(藍嶺) : 옛날 엄씨성을 가진 신선같은 사람이 살던 언덕이라 엄능이라 불렀고, 임진왜란때 밀양박씨가 처음으로 푸른 풀을 헤치고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남재"라고 부른다.
  • 내춘(內春) : 엄능에서 논밭을 일구어서 옮겨 옴으로서 마을이 생겼다하여 엄전(嚴田) 또는 안음지이라 한다.
  • 외춘(外春) : 내춘보다 뒤에 생겼으므로 새터 또는 바깥음지이라고 한다.
  • 교동(校洞) : 마을에 주막이 있어 "주막담" 이라하다가, 광복 후 춘진초등학교가 서고나서 부터 교동이라 한다.

진목리(眞木里)

마을 가에 참나무가 많아서 진목, 진목지이라고 하다가, 1973년 안의면에서 남상면 진목리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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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면 총무담당(☎ 055-940-76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