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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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면(高梯面)

옛날 성초역(省草驛)으로 가는 길목에 한 도승(道僧)이 놓았다는 높이 6미터, 길이 11미터의 큰 돌다리를 "높은다리"라 하였는데, 이 다리 이름이 곧 면이름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북창리(北倉里), 입석리(立石里), 개명리(開明里), 손항리(遜項里), 수다리(水多里), 성초역리(省草驛里), 둔대리(屯垈里), 임당리(林塘里) 8개 리가 있었고, 지금은 농산리, 개명리, 봉계리, 봉산리, 궁항리 5개 리로 나눈다.

본 군의 북쪽 끝에 자리하여 대덕산과 삼봉산으로 뻗은 소백산맥이 전라북도와 경계를 이루고, 대덕산에서 동남쪽으로 내미는 가지는 경상북도와 경계를 이룬다. 본 면의 동쪽은 웅양면, 서쪽은 북상면, 남쪽은 주상면과 맞 닿는다. 본 면의 복판을 북에서 남으로 뻗은 산줄기 동쪽을 큰골이라 하며, 봉계리, 봉산리, 궁항리가 있고, 도마현(道磨峴)을 넘어 무풍(茂豊)에 이어진다. 서쪽 골짜기를 작은골이라 하며 개명리로서 빼재(秀嶺)를 넘어 구천동으로 통한다. 큰골과 작은골이 어울리는 본면의 남쪽 끝에 농산리가 있다.

농산리(農山里)

본 면의 남서쪽 끝에 자리하여 주상면, 위천면, 북상면과 맞닿는다. 원농산, 금계, 입석, 손항, 온곡 다섯 마을이 있다.

  • 원농산(元農山), 성가막골 : 400여 년 전에 창녕 성씨가 마을을 열어 "성가막골"이라고 한다. 왕무덤골 : 마을 남쪽 200미터, 주상면과의 경계 산속에 있는 골짜기, 옛날 싸움에서 죽은 장수의 무덤이라는 큰 무덤 인 왕무덤이 있다.
  • 금계(金鷄), 접재실 : 원농산의 냇가 동쪽 한쪽을 금계라 하며 이전에는 "접재실"이라 하였다.
  • 입석(立石) : 고제면 사무소 소재지로서 고려 때에는 절터였다고 하며 큰 돌이 서 있으므로 선돌, 입석이라 한다. 높은 다리가 있었 으므로 높은다리 고제라는 이름이 생겼다. 신선들이 살던 곳이라 선들, 선평(仙坪)이라고도 하였다.
  • 손항(巽項), 솔목 : 마을 북쪽 손방(巽方)이 좁고, 솔다하여 "솔목"이라 한다. 약 300년 전 팔계 정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전한다.
  • 온곡(溫谷), 더우실 : 겨울에도 따뜻하고 아늑하므로 "더우실"이라 한다. 260 ~ 70년전에 경씨와 양씨(慶氏, 梁氏) 들이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개명리(開明里)

본디 이 골짜기를 거문골이라 하였다가 300여 년 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여 개명하였으므로 개명골이라 한다. 수유동, 괘암동을 개명리 1구, 2구에 개명골이 있고, 북쪽 끝에 물안실이 있다.

  • 수유동(水踰洞), 무너미 : 마을 뒷산너머 개발골 골짜기 물을 끌어 넘겨서 농사지었으므로 "무너미"라 한다. 250여 년 전 진양 하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전한다.
  • 괘암동(掛岩洞) : 마을 뒤 농삿길에 긴 돌이 길 가운데 걸려 있으므로 생긴 이름이다. 250여 년 전 경주 김씨가 삶으로써 마을이 되었다.
  • 개명골(開明 2區) : 300여 년 전 성산 배씨가 마을을 열었다 하며, 상개명과 하개명 두 담으로 나눈다.
  • 수내(水內), 물안실 : 마을 곁의 냇물이 마을을 안고 있는 듯하여 "물안실"이라 한다. 옛날에는 수다리(水多里)라 하였다. 300여 년 전 진양 하씨가 마을을 열었다. 전라북도 무주군과 경계를 이루는 빼재에서 흐르는 물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면서 삼포, 하수내, 신기골터, 상수내, 빼재 같은 작은 마을이 흩어져 있다.

봉계리(鳳溪里)

탑선, 지경, 소사, 원기, 원봉계, 내다 여섯 마을이 있다.

  • 탑선(塔仙) : 옛날 죽산 전씨(竹山全氏)가 마을을 열었다 하며 마을 앞에 높이 1미터의 2층 석탑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동쪽 원탑선을 "탑서이"라 하고 서쪽에 소사, 북쪼겡 지경이 있는데 이들 세 담을 통틀어서 "탑서이"라고 부르며, 대덕산과 삼봉산 사이에 안긴 높이 700미터의 고냉지대이다.
  • 지경(地境) : 옛날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으며 지금의 영, 호남의 경계이다. 경상도 땅 안에 있으므로 "지경내"라고 하며 장포 (長浦)라고도 썼다.
  • 원기(院基) : 옛날 성초역에 따른 원(院)이 있었으므로 원터라 한다.
  • 원봉계(元鳳溪) : 옛날 마을 근처 골짜기마다 불당이 많아서 "당골"이라 하다가 한말 이곳에 살면서 동학혁명 때 치안유지에 공이 있었다는 하종호(河宗浩)의 호 봉서(鳳棲)에서 새봉자를 따서 봉계라 고쳤다 하고 300여 년 전 엄씨(嚴氏)가 마을을 열었다고 전한다.

봉산리(鳳山里)

서북쪽에 솟은 두루봉이 봉황새 모양이라 봉산리라 한다. 와룡, 용초, 구송, 둔기 네 마을이 있다.

  • 와룡(臥龍) : 마을 뒤편에 삼봉산이 솟아있고 땅 모양새를 보고 용강(龍崗)이라 하다가 와룡 선생이 시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300여 년 전 인천 채씨(仁川 蔡氏)가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 용초(龍草) : 광복 후에 용호동(龍胡洞)과 성초(省草) 두 마을을 어울러서 붙인 이름이다. 성초는 옛날 성초역이 있던 곳이다. 300여 년 전 밀양 박씨들이 마을을 열었다고 전한다.
  • 구송(九松) : 괴정, 구룡, 송정(槐亭, 九龍, 松亭) 세 마을을 광복 후에 합쳐서 지은 이름이다. 300여 년 전에 삼척 진씨(三陟 陳氏)가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 둔기(屯基) : 옛날 신라와 백제가 싸울 때 군사가 진을 쳤던 곳이라 "둔터"라 하고 400여 년 전에 손, 오, 강(孫, 吳, 姜) 세 성씨가 살았으므로 "손오강터" 라고도 한다.

궁항리(弓項里)

고제면의 큰 골 남쪽 어귀에 자리하고, 북쪽에 학림, 동쪽에 원궁항, 남쪽에 산양이 자리 잡고 있다.

  • 매학, 방학, 임당 : 세 마을을 광복 후 합하여 학림이라 하였다. 300여 년 전에 합천이씨가 들어와 삶으로써 마을이 되었다 하고 매학(梅鶴)은 매화나무와 학이 있었다 하고, 방학(放鶴)에도 학이 있었으며, 임당(林堂)은 지금은 없어졌으나 울창한 숲속에 자리하였다고 전한다.
  • 원궁항(元弓項), 활목 : 마을 둘레의 산과 마을 복판을 가로지르는 개울이 활과 같아서 "활목"이라 한다. 260여 년 전에 신창 표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전한다.
  • 산양(山陽), 뫼너미 : 산 넘어 남쪽을 바라보는 마을이라 산남(山南) "뫼너미"라 하다가 산 밑의 양지 바른 곳이라 산양으로 바뀌었다. 300여 년 전에 삼척 박씨가 함양 수동에서 옮겨 옴으로써 마을이 생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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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제면 총무담당(☎ 055-940-74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