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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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마리

대촌, 신촌, 안흥 3마을이 있다.

대촌(大村)마을

대촌(大村)마을 전경

"됫뫼, 큰마"라고도 하였으며 1962년부터 대촌이라 하였다. 대촌마을은 1550년께 하빈이씨가 마을을 열었으며, 뒤쪽으로 해발 709m의 금귀산(金貴山)이 자리잡고 있으며 옛날 봉수대가 있어 봉우산이라 부르기도 하며 산정의 남쪽편에 금귀사가 있었다고 한다. 마을 북동쪽 300m에 있는 재궁골(梓宮谷)은 석장골(石葬谷)이라고도 하며 사적 239호인 둔마리 벽화고분이 있는 곳이다.

신촌(新村)마을

신촌(新村)마을 전경

"뒷뫼새마"라고도 하며 1730년께 봉산인 이경남 (李景男)이 옮겨 왔다고 한다. 마을 북서쪽 1km 불매등 북쪽 금귀산 중턱의 골짜기로 옛날 스님들이 피난가면서 부처를 묻었다고 한 불매골(佛埋谷)이 있다.

안흥(安興)마을

안흥(安興)마을 전경

고려때 관안산의 갓안골에 있었던 안흥사 절 이름에서 마을이름이 생겼고 함양 오씨와 청주 한씨에 의해 창동되었다고 한다. 마을입구 지방도변에 둔마초등학교는 1953년 개교하여 1994년에 폐교되었다.

양항리

아주, 내곡, 상촌, 대곡 4마을이 있다.

아주(鵝洲)마을

아주(鵝洲)마을 전경

고려말 거제현의 속현인 아주현에서 마을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마을남쪽 2km 떨어진 산속에 큰 방만한 자연굴인 인굴(人窟)이 있으며 옛날 사람들이 피난하였던 굴이라고 알려져 있다.

내곡(內谷)마을

내곡(內谷)마을 전경

1850년께 파평 윤씨와 연안 송씨가 아들을 얻기 위해 새터를 잡아 옮겨 온 연유로 "살목 새터"라고도 불린다.

상촌(上村)마을

상촌(上村)마을 전경

"살목 웃마"라고도 하는데 살목이란 마을앞을 흐르는 양항천의 서쪽이 좁아서 고기잡이 살을 놓기 좋은 여울목이라 하여 생긴 이름으로 시항(矢項), 전촌(箭村이)이라 썼고 조선말까지 고모현면의 면사무소가 있던 마을이다. 옛날 창녕 조씨와 함종 어씨가 먼저 살았다고 전해진다.

대곡(大谷)마을

대곡(大谷)마을 전경

"살목 큰골"이라고도 하며, 고려말 무과급제를 했던 유형귀 장군의 전설이 있으며 뒷산에 유장군의 묘가 있다. 마을 북동쪽 아주로 가는 산골짜기 중신골에 고려때 창건한 청연사터가 있었는데 300여년 전 심소정 중건 때 뜯어서 옮겼다고 한다.

무릉리

양곡, 무릉, 월곡, 산포 4마을이 있다.

양곡(陽谷)마을

양곡(陽谷)마을 전경

마을 남서쪽 황강냇가에 큰 바위가 있으며 벼락바위 또는 양석(陽石)이라 하였는데 450여 년 전 큰 바위 그늘을 피하여 양지바른 곳에 자리를 잡은데에서 마을 이름이 유래되었으며 1530년 신여좌가 양평에서 옮겨 왔다고 한다. 마을 뒤쪽으로 성령산이 있으며 정상주위에 옛 성터가 150여 미터가 남아있고 월곡산성터라고도 하며 중턱에 정토사(淨土寺)가 있다.

무릉(武陵)마을

무릉(武陵)마을 전경

"무릉동, 무등곡" 및 "무덤실" 등으로 불리는데 삼한시대 이 부근에 陣地가 되어 전사자의 무듬이 마을뒷산에 많아서 불러진 이름이나 마을내 무릉도원(武陵桃源)이 있었다하여 武陵이라 불리워지고도 있다. 옛 무등곡면에 면사무소가 있었고, 1914년 고모현면, 지차리면과 합하여 남하면을 만들때 면사무소를 무릉에 두게 되었으며 현재 소재지 마을이다. 마을의 서쪽을 바라보는 북쪽부분을 "넘마", 남쪽의 남, 서로 향하는 곳을 골담이라 한다. 가야시대 김해 허씨가 처음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전한다.

월곡(月谷)마을

월곡(月谷)마을 전경

마을 남쪽 어귀의 청룡날이 반달 같아서 半月山이라 하고 월이곡리(月伊谷里) "달이실"이라 하다가 현재 이름으로 불리워지며 예종1년(1469년) 화순인 최세식이 살기 시작했고, 임진란 때 영산인 신정걸이 옮겨 왔다고 전해진다. 마을 북동쪽에 일산봉이 있으며 빼재는 잿길로서 지산리로 통한다.

산포(山浦)마을

산포(山浦)마을 전경

마을뒤에는 山이 앞에는 黃江이 흐르고있어 山을 싸고 川이 흘러 내린다하여 山浦라고 불리워지나 武陵桃源을 찾아 가려면 이 마을에서 묻는다는 뜻에서 "멱실(覓谷)"이라 하였고 18세기 말엽 정조때에 광산김씨와 화순최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면사무소가 무릉(평촌)에 소재하였으나 주민불편으로 멱곡으로 이전하여 10여년간 존속하다가 1930년 무릉마을로 재이전되었다.

대야리

대야, 오가, 용동, 가천 4마을이 있다.

대야(大也)마을

대야(大也)마을 전경

마을 뒤에 대밭이 있어 "대바지"라고도 하며 뒷산이 "잇기야"자 같아서, 또는 냇가에 대장간이 있어서 "풀무 야(冶)" 자를 써서 대야(大冶) 또는 대바지의 "바"자를 아(雅)로 써서 대아(大雅)라고도 하였다. 마을 뒤쪽에 감투봉이 자리하며 옛날 원님이 대바지 무우맛에 반하여 사임산을 감투봉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1989년 합천댐 건설로 많은 가구가 정든 고향을 떠났으나 2004년 문화마을 조성으로 주택이 늘고 있다.

오가(五可)마을

오가(五可)마을 전경

다섯 번은 피난할 수 있는 곳이라 "오가리"라고도 하며 한 도사가 나라안 사람이 사흘 먹을 것이 있다 하였는데 과연 이곳 금광에서 많은 금이 나왔다고 한다. 17세기 중반 효종 때 전라도 창평에서 고세징(高世徵)이 옮겨살기 시작하였다고 전해진다. 1917년께 금광을 열어서 한때 10명의 광주 및 100여명의 광부가 50여호의 가구를 이루어 살았다.

용동(舂洞)마을

용동(舂洞)마을 전경

마을뒷산이 "방아공이"설이라 하고, 마을 근처에 방앗간이 있어"방앗재"라고도 하며 진양정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전한다. 마을 북서쪽 뒷산에 가천에서 대야로 통하는 방앗재가 있다.

가천(加川)마을

가천(加川)마을 전경

가천 냇가 산 기슭 개천이 골짜기의 가장 안쪽에 있으므로"안개천"이라고도 하며 1597년 정유재란때 추사용(秋史庸)이 영월에서 옮겨와 마을이 시작되었다 한다. 마을 북동쪽 가조방향 1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쇠를 만들던 점터가 있다.

지산리

자하, 신기, 장전, 천동, 대사 5마을이 있다.

자하(紫霞)마을

자하(紫霞)마을 전경

처음에는 북서쪽 산기슭에 살다가 호랑이를 피해서 지금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조그마한 골짜기에 피난하여 숨어 사는 곳이라 "숨을 은(隱)"을 사용 "어은리(漁隱里), 어인골"이라 하던 것을 고종 32년(1896년) 거창부사 홍세영(洪世永)이 자하로 고쳤다. 또한 이조 22대 영조대왕 4년에 거창읍에 거주하였던 居昌劉氏들의 逃避한 곳이라는 뜻에서 隱골이라 불렀고 15세기 중엽 세조때 거창유씨가 마을을 열었다고 한다.

신기(新基)마을

신기(新基)마을 전경

지산리에서 가장늦게 생긴 마을로 "새터"라고도 부르며 15세기 전반 중종때 하빈 이씨가 옮겨 왔다고 한다. 지산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폐교되었으며 현재는 가조로 학구가 변경되었다. 화주대골은 마을에서 남서쪽 1 킬로미터 대야와 오가의 경계에 있는 골짜기로 하빈인 이상모, 이최묵 양대가 진사가 되어 선산에 석물을 할때 화주대를 세웠던 곳이라 한다.

장전(墻田)마을

장전(墻田)마을 전경

동네 터가 밭으로 둘레에 담장이 되어 있어 "담안밭"이라 부르던 것이 마을 이름이 되었으며 줄여서 "담밭"이라고도 하며 1728년 무신란 때 가조 녹동에서 성산 배씨가 옮겨 왔다고 한다. 마을 남서쪽 300미터 지점에 금천골이 있으며 죽백산에 잇땋아 금이 많이 있다하여 이름하였고 일제 때 5년간 금광업이 성했던 곳이다.

천동(泉洞)마을

천동(泉洞)마을 전경

마을 뒤편에 물맛이 좋은 우물이 있어 "정곡리(井谷里)"라 하다가 1896년에 홍세영 부사가 천동(샘골)으로 고쳤다고 하며, 15세기 중엽 이침(李沈)이 대구에서 옮겨 왔다고 한다. 마을 북동쪽 뒷산에 장군석 날등이 있으며 임진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지세를 살펴보고 인재가 날것을 막기 위해 지도에다 붓으로 맥을 끊으니 이 날등 땅이 패이면서 피가 났다는 전설이 있다.

대사(大寺)마을

대사(大寺)마을 전경

지산리에서 가장 먼저 생긴 마을로 한점리(寒店里)라 부르고, "한절골"이라고도 하며 여기서 절은 옛 관청을 뜻함, 마을뒷산에 큰 절이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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