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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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두메산골서 부르는 희망의 노래

작성일
2009-12-28 13:58:53
이름
농업기술센터
조회 :
1940
어깨 밑까지 내려온 긴 머리, 풀 눌러쓴 모자, 잘 먹지 못해 마른 듯한 외모, 김화국(45세) 씨의 모습에서 1990년대 초반 286 컴퓨터를 만들었던 컴퓨터 1세대와 한때 반도체 관련 무역대리업을 하여 연봉 1억원 정도를 벌었던 경영주의 구석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차라리 속세를 떠난 도인 같아 보이는 그는 실제로 10여년간 사람이 살지 않았던 외딴 폐가를 수리해 혼자 살고 있다. TV도 안나와 밤이면 성경 읽기에 재미 붙인 그는 도시에 떨어져 살고 있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우리 시대 평범한 가정이다.

10여년간 사람 살지 않던 폐가 수리해 보금자리로

김회국 씨가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한 때는 지난 3월. 2008년 3월 강원 횡성으로 귀농해 1년간 살았던 우천면 정금리에서는 장기 임대할 임야를 찾을 수 없었다.
한우와 농산물가공을 계획하고 있는 그는 10년 이상 장기간 안정적으로 계획을 펼칠 수 있는 땅이 필요했다. 수소문해서 임야 8만㎡를 10년 장기 임대한 곳이 서원면 압곡리이다.
그의 집은 임대한 임야 내에 있다. 10여 년간 사람이 살지 않아 전기는 끊기고 물도 나오지 않았다. 넝쿨이 지붕까지 뒤덮고 집안은 박쥐의 소굴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농지와 가까이서 농사를 지으려면 그 집 말고는 대안이 없었다. 김 씨는 대대적인 수리작업에 들어갔다.
수도를 고치고 전기공사를 하고 지붕을 고쳤다. 문도 새로 달아 페인트칠하고 굴뚝도 손보았다.
“농촌에서는 웬만한 일은 스스로 해야 합니다. 배관과 싱크대도 모두 혼자 고쳤습니다.”
사람 살지 못할 것 같은 집이 전원주택(?)으로 탈바꿈한 건 몇 달에 걸친 그의 DIY(Do It Yourself)덕분이었다.
그는 집 앞 언덕의 잡목을 모두 정리하고 풀을 깎아 시야를 탁 트이게 만들고 흑염소 4마리를 놓아 기르고 있다. 마당도 정비해서 닭장을 만들어 토종닭 10여 마리와 개 몇 마리도 키우고 있다.

비싼 땅값 때문에 고창으로의 귀농 포기

김 씨의 고향은 횡성에서 멀지 않는 대관령이다.
대관령에서는 부모님의 뒤를 이어 큰형이 씨감자 농사를 대규모로 하고 있다.
2006년말 실질적으로 반도체 관련 무역대리업을 접은 그는 고향에서 한우 사육을 하려 했었다. “농기계를 쓰지 않고 혼자 할 수 있는 작목이 축산이라고 생각한 거죠.”
실제로 그는 2006년 11월 송아지 7마리를 구입해 대관령에서 축산을 하던 친구에게 위탁사육을 맡겼다. 그리고 대관령에 임대할 땅을 알아보았으나 땅값이 예상보다 너무 비쌌다.
고향으로 귀농이 어렵게 되자 김 씨는 2007년 1월부터 천안연암대학 귀농지원센터가 주관한 도시민농업창업교육 채소반을 신청했다.
사실 그는 이전에도 귀농 준비를 위해 몇 차례 귀농교육을 받았다.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교육을 받으며 39기 동기회장도 맡았고 귀농에 도움이 될까봐 야생화교육과 염색교육, 인공수정교육 등도 수료했다.
“농촌에 내려오니까 실제적으로 물어볼 곳이 없더라고요. 그런데 천안연암대학 귀농지원센터는 교육 수료 후에도 관리를 잘 해주어 채상헌 교수가 횡성으로 직접 내려와 귀농이 잘 진행되고 있는지 살펴주기도 했습니다.”

귀농 첫해 경험삼아 40여가지 작물재배

대관령으로 귀농을 포기한 김 씨는 차선책으로 한우 주산지이면서 고향과 멀지 않은 횡성으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횡성에 연고가 없었던 그는 알지도 못하는 갑천면 포동리 이장에 전화를 걸어 만나자고 해서 살 집을 부탁했다.
이장의 주선으로 우천면 정금리 빈집을 얻어 귀농한 것이 2008년 3월, 그는 그때부터 경기 안양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있다. 고등학생과 중학생인 두 딸의 교육문제 때문에 가족은 도시에서 계속 지내야 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안양에 올라간다는 그는 “가족과 떨어져 있는 부분이 가장 안타깝습니다. 혼자 식사할 때는 가끔 서글프기도 하죠. 가족과 어떻게 합치느냐가 지금 최대 고민입니다.”라며 가족과 같이 살지 못하는 현실을 귀농의 가장 어려운 부분이라고 말했다.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일까. 김 씨는 처음부터 고된 농업노동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귀농 첫해부터 1만 2,200㎡의 농지를 빌려 웬만한 농작물은 모두 재배해 보았다. 고추, 고구마, 배추, 무, 감자, 옥수수, 브로콜리, 콩, 참깨, 들깨, 야콘, 오이, 토마토, 수박, 갓, 해바라기 등등, 줄잡아 40가지나 됐다.
당초에는 체함학습 농장을 위해 다양한 작물을 재배했으나 워낙 가지 수가 많다 보니 발아가 잘 되지 않거나 작업이 겹치기도 하였다.
무엇보다 어려웠던 일은 제초제를 일절 사용하지 않고 삽과 호미로만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제초작업이 끝이 없었다.

장류사업 위해 장 담그기 체험

작물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던가. 처음 농사를 지었지만 김회국 씨의 부지런함 때문인지 서울 가락시장에서 경매로 팔린 그의 고추는 보통보다 높은 가격을 받았다.
배추, 무, 브로콜리, 단호박 등은 안양 집 부근에서 직판도 하고 옥수수는 삶아서 둘째 딸과 도로변에서 팔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그가 귀농 첫해 올린 소득이 600만원 정도. 도시에서의 소득에 비하면 액수로는 훨씬 적었지만 그 가치는 견줄바가 못되었다.
김 씨가 꼭 해보고 싶은 농업 부문은 장류 사업이다.
“고추장, 된장, 막장 등은 누구나 먹어야 하는 식품이잖아요. 농촌의 맛을 살릴 수 있는 부분이 줄어드는 요즘 이러한 장류는 틈새시장이 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그는 귀농한 이후 김치, 두부 등 요리하는 방법을 배우고 2년째 대관령에서 장 담그는 경험을 하고 있다.
올해 밭을 포함한 8만㎡의 야산을 임대한 이유도 장류 사업 체험장을 위한 계획 때문이다.
김 씨의 내년 가장 큰 계획은 축산을 시작하는 것. 그는 굴삭기를 구입해 겨울부터 축사를 짓기 시작하려고 한다.
횡성군은 축산을 장려하고 주위에 소 키우는 농업인들이 많아 한우 사육에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교회 통해 마을 사람들과 친목 도모

전에는 기도하는 것도 싫어했던 김 씨가 농촌에 내려와 교회에 다니게 된 일도 큰 변화 가운데 하나이다.
“마음이 혼란스러워서 의지할 곳이 필요했어요. 교회에 다니면서 마을 사람들과도 친해졌습니다.” 사실 그는 현지인들과 큰 어려움 없이 지내고 있다.
“마을에 새로운 사람이 오면 유심히 지켜봅니다. 아홉 시에 일어나 돌아다니면 당연히 안 좋은 소문이 나겠죠. 생활방식이 틀린 현지인과 마찰이 생길 수 밖에 없으나 자기 고집을 꺾고 마을 일에 만사를 제치고 참여했더니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에 내려와 만성적인 비염 알레르기가 거짓말 같이 없어졌다는 그는 새벽 4시에 일어나 일하다가 어두워지면 인터넷을 하거나 성경을 읽다가 밤 9시면 잠자리에 든다.
그는 일단 귀농을 한 다음에는 여유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조급해서 해결될 일은 아무 것도 없다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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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농업기술센터 귀농귀촌담당(☎ 055-940-8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