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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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면(神院面)

거창군의 남쪽 끝에 자리하며 동쪽은 합천군과, 서쪽과 남쪽은 산청군에 맞닿았다. 1914년까지는 삼가군(三嘉郡)이었으며, 동쪽은 율원면(栗院面)으로 수원리, 양지리, 구사리가, 서쪽에 신지면(神旨面)은 과정리, 와룡리, 대현리, 중유리, 덕산리, 청수리 6개 리가 있었다. 1914년 삼가군이 합천군과 합하면서 신지, 율원 두 면을 묶어서 신원면으로 고쳐서 거창군에 편입시켰다. 지금은 9개 리로 나뉜다.

수원리(水院里)

신원면의 동북 끝에 자리하며 수다와 원동 마을 이름에서 한 자씩 따서 지었다. 수다, 반송, 신평, 국동, 원동, 상원동 여섯 마을이 있다.

  • 수다(水多) : 마을에 맑은 물이 흐르고 뒷산이 '많을 다' (多)자 또는 말물(勿)자 모양이라 '수다'라 이르는데 '물안실'이라고도 부른다.
  • 반송(盤松) : 마을 앞 옥계천(玉溪川)옆의 참나무 숲을 '반송 숲'이라 하는데서 이름되었고, 1940년에 수다 마을의 박성구(朴成九)가 농사 짓기 위해 옮겨 살기 시작했다.
  • 신평(新坪) : 들 가운데 새로 생긴 마을이라 신평, '새들'이라 한다.
  • 국동(菊洞) : "접주골"이라 하며 김영인 김영필(金永弼)이 원동 마을에서 옮겨 왔다.
  • 원동(院洞) : 율원면의 동쪽 끝에 있으므로 원동(院東)이라 하다가 '동녘 동'자를 '골동 자'로 바꾸었다.
  • 상원동(上院洞) : 원동마을 위쪽에 있다 하여 이름 하였다.

양지리(陽地里)

옛 삼가군 율원면이었던 곳으로 저전, 샛담, 안봉, 양지, 수옥, 창촌 여섯 마을이 있으며, 그 가운데 가장 큰 양지마을 이름을 따서 양지라 한다.

  • 저전(楮田) : 마을 둘레에 닥나무가 많아서 "딱밭골"이라 한다.
  • 샛담 : 저전 마을 북서쪽 400m에 있다. 6.25 한국전란 때 수원 백씨가 저전 마을에서 옮겨 왔다고 한다.
  • 안봉(安峰) : 사방이 산에 가리어 보이지 않으므로 '안비이'라 한다.
  • 양지(陽地) : 양지 바른 마을이므로 '양지마'라 한다.
  • 수옥(水玉) : 삼가군 율원면에 따랐을 때 삼가 현감이 자기 자가 수옥이어서 화옥(禾玉)이라고 마을 이름을 고쳤던 것을 광복 뒤 다시 찾았다.
  • 창촌(倉村) : 삼가현 때 창고가 있었으므로 "창마"라 한다.

구사리(九士里)

옛 율원면에 따랐고, 율암, 감악, 상감악, 구사, 신기, 새샛터, 원평의 7마을이 있다.

  • 율암(栗岩) : 마을 앞 옥계천(玉溪川)에 밤같이 생긴 바위가 있으므로 "밤바우"라 하였다.
  • 감악(甘岳) : 감악산 기슭에 있으므로 이름되었고, 피난처로서 이름났으며, 6.25 동란 때도 무사하였다. 가매기라 한다.
  • 상감악(上甘岳) : 웃가매기라고 한다. 감악사터(甘岳寺址)가 있다.
  • 구사(九士) : 거북구, 사자사 구사(龜獅)라 쓰다가 아홉구 선비사 자로 바꾸었다.
  • 신기(新基) : 마을 뒤 "터뒤"에서 새로 옮겼다 하여 "새터"라 한다.
  • 새샛터 : 1936년 병자년 수해로 집을 잃은 새터 사람들이 옮겨 새 마을을 이룩했다.
  • 원만(元萬) : 1974년 새마을운동으로 원평(原坪)마을을 만들어서 옮겨가고, 지금은 터만 남았다. 원마이라 했다.
  • 원평(元坪) : 6.25 동란 뒤에 곽종섭, 김재봉이 원만에서 피난해서 살던 곳에 1974년 곽재섭(廓在燮)을 비롯하여 원만 마을이 함께 옮겨와서 산다.

과정리(瓜亭里)

관동, 번덕, 외세안, 내세안, 과정, 창지 여섯 마을이 있다.

  • 관동(冠洞) : 갓 쓴 선비들이 출입함으로 관마라 한다.
  • 번덕(番德) : 감악산 남쪽 기슭 길가에 있는 마을이다.
  • 세안(世安) : 임진왜란 때 세상이 편안하게 피난했다 하여 이름 붙였고, 동쪽담을 외세안(外世安), 서쪽담을 내세안(內世安)이라 하였다.
  • 과정(瓜亭) : 마을 뒤 철마산(鐵馬山)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내려온 모양이 참외 넝쿨 같고, 옛날 이곳에 원두막이 있으므로 "외막거리"라 하였다. 마을 남쪽 담에 쇠를 다루는 가게가 있어서 점촌(店村)이라 했는데 지금은 두 담이 한 마을이 되었다.
  • 창지(倉旨) : 옛 신지면의 창고가 있어서 이름되었다.

덕산리(德山里)

거창군의 남상면과 신원면, 함양군과 산청군의 경계에 솟은 높이 666m의 덕갈산(德葛山)아래 있으므로 덕산리라 하며, 옛 신지면에 따랐다. 지금은 내동, 청연, 오례, 신기의 네 마을이 있다.

  • 내동(內洞) : 감악선 서쪽 기슭에 남서쪽으로 들어앉은 마을이라 내동이라 한다.
  • 청연(淸淵) : 감악산 북서쪽 건너편 마을이다. 감악산에서 흐르는 맑은 물이 마을 아래에서 소를 이룸으로 이름 되었다. "청수태"라고 부른다.
  • 오례(悟禮) : 마을 앞에 산을 만들어서 숲을 이루게 하여 "조산마"라 하던 것을 조선 말 면우 곽종석이 옮겨 와 연수사에서 공부할 때 오례라 고쳤다.
  • 신기(新基) : 오례마을 북동쪽 200m에 있다. 오례에서 제금나서 새로 이룬 마을이라 "새터"라 한다.

청수리(淸水里)

청용, 수동, 대안 세 마을이 있다. 청용과 수동에서 한 자씩 다서 청수리라 하였다.

  • 청용(靑龍) : 청동(靑洞)이라고도 하며, 마을 남서쪽에 비룡산(飛龍山)이 있어서 청용이라 한다.
  • 수동(水洞) : 물이 많아서 수동이라 하고, 6.25 때 불탄 마을이다.
  • 대안(大安) : 옛날 순흥안씨가 마을을 열었다하여 이름 되었고 6.25 동란 때 불탄 것을 1953년에 다시 이룩했다.

중유리(中楡里)

느릅나무가 많은 골짜기인 유곡(楡谷)의 중간에 자리하므로 중유리라 한다. 하유, 중유, 상유, 예동, 신촌, 유항 여섯마을이 있다.

대현리(大峴里)

골짜기 전체를 한재골이라 해서 괘현이라고 쓰며, 내탄, 외탄, 도토점, 진목평, 하대현, 대현, 중대현, 상대현 등 8개 마을이 있다.

  • 내탄(內呑) : "탈양"이라고 한다. "탄"이란 골짜기를 뜻하는 고구려 말이다.
  • 외탄(外呑) : "바깥탈양"이라 부른다. 탈양의 바깥에 새로 생겼으므로 붙은 이름이고, 새터라고도 한다.
  • 진목평(眞木坪) : 본시 참나무가 서있는 100여 마지기의 논들을 "참나무지"라 하였다.
  • 하대현(下大峴) : 한재골 아래쪽에 있는 마을로 "굼터마"라고 한다.
  • 대현(大峴) : 큰재도 아닌데 큰재, 한재, 대현이라 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으려 했다고 전한다.
  • 중대현(中大峴) : 중새터 또는 용인평(龍印坪)이라고도 한다.
  • 상대현(上大峴) : 한재골 위쪽에 자리하며 마을 앞에 용교라는 나무다리가 있어서 "용다리걸" 용교동(龍橋洞)이라고도 한다.
  • 진목평(眞木坪) : 본시 참나무가 서있는 100여 마지기의 논들을 "참나무지"라 하였다.

와룡리(臥龍里)

우리군의 가장 남쪽에 자리하며 소룡산 동쪽 기슭을 베고 누워있는 모양이므로 와룡리라 하며, 비곡, 가대, 백계, 소야, 소룡 다섯 마을이 있다.

  • 비곡(飛谷) : 남서쪽에 소룡산이 있고, 북동에는 월여산 밑에 닭이 알을 품고 있는 명당자리가 있어서 비곡 "빅실"이라 한다.
  • 가대(加垈) : 소야에서 갈려나간 마을이다. "더터"라 한다.
  • 백계(白桂) : 월여산 남쪽 합천군 대병면에 가는 백기재 옆에 있는 마을이라 "백기"라 한다.
  • 소야(所也) : 산이 잇기야(也)자 모양으로 생겨서 소야라 한다.
  • 소룡(巢龍) : 마을 뒷산 소룡산 이름으로 마을 이름을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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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원면 총무담당(☎ 055-940-77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