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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귀농 실패에서 배운 교훈, 두 번째 귀농 성공의 밑거름

작성일
2009-11-16 09:25:59
이름
농업기술센터
조회 :
2047
경기 파주에서 한우와 육우를 합쳐 200두를 사육하고 있는 이태학(43세)씨는 파주가 두 번째 귀농지이다. 첫 귀농지인 충남 당진에서는 축산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8개월 만에 떠나야 했다. 축사를 짓기 위해서는 이웃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마을 주민들과의 원만한 관계 형성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가 지금의 축사를 우연히 임대 받아 계획했던 축산에 뛰어든 지금도 지역 주민들과의 관계를 영농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유도 첫 귀농지에서 얻은 교훈에서이다.

◇ 오래할 수 있는 일 정답은 ‘농사’

이태학 씨의 귀농 동기는 회사원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생각하는 그런 것이다.
중소기업 영업직으로 일하면서 40대를 바라보고 있던 그는 어느 날 문득 직장선배들이 “나이가 50대 되면 직장을 그만 둬야 하고 갈 곳이 없어져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된다”는 충고(?)가 자신의 얘기처럼 들렸다.
“그래서 오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궁리해 보았죠. 먼저 생각난 일이 자영업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농업 관련 분야가 좋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농업 분야에서도 수도작과 원예는 계절적인 요인이 강하기 때문에 배제했고 연중 일할 수 있는 축산과 버섯에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교사인 아내는 남편의 귀농 결정에 처음에는 걱정했지만 묵묵히 지켜봐 주었다. 지금도 아내 최영란(42세)씨는 원래 살았던 경기 부천에서 교사로 일하면서 주말 부부 생활을 감수하고 있다.
축산과 버섯 쪽으로 진로를 결정한 이태학 씨는 2004년부터 농사지을 땅을 물색하러 다녔다. 수도권은 토지 가격이 워낙 비싸고 교통이 의외로 좋지 않아 선택한 곳이 충남 당진군에 자리 잡은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 농사지을 토지부터 구입

경기 김포에서 양돈을 하고 있는 남동생의 자금을 보태어 2005년 3월 당진에 1만㎡의 토지를 구입한 이태학 씨는 같은 해 10월 10년간 다녔던 회사에 과감히 사표를 던지고 2006년 여름 한국농업대학에서 진행된 3개월 과정의 버섯 도시민창업농과정을 신청했다.
“느타리버섯을 하려고만 했지 실제 버섯에 관해 아는 것이 없었는데 교육을 통해 많은 지식을 얻었습니다. 버섯 교육 외에도 리더가 군림하지 말고 봉사해야 한다는 ‘Servant Leadership'교육이 귀농시 현지 주민들과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버섯과 축산에 대한 열정적인 독학 결과 그는 버섯종균기능사와 가축인공수정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다. 농사철에 맞추어 2007년 2월 혼자 당진에 도착한 그는 새로 집도 짓고 길도 닦았다.

◇ 마을 주민들의 반대로 축사 짓지 못해

그는 버섯이 자금회전이 빠르고 배지를 축산사료로 이용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버섯 재배에 대해 알아보려고 버섯 농가를 많이 찾아 다녔다.
하지만 당시 버섯 재배 농가들의 상황은 좋지 않아 보였다. “버섯 농가의 애로사항을 들어보니 생산성이나 수익 창출이 구조상 힘들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고 ‘돈 투자해서 버리는 농사가 버섯’이라는 어떤 농가의 충고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버섯 농사가 잘 될 듯하다가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는 주위의 얘기에 버섯은 일단 보류하고 축산부터 하기로 결정한 그는 이번에는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 축사를 지을 생각은 하지 말라”는 마을 주민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축산은 냄새와 폐수 등으로 인해 아직 혐오산업으로 인식되고 있었고, 평생 그 마을에서 농사만 지어온 주민들에게 설득과 타협은 통하기 어려웠다. 더군다나 어느 날 갑자기 도시에서 농사 경험도 없는 사람이 땅을 사서 나타나 축사를 짓겠다고 하니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고을 수 만은 없었다.
그는 “땅을 사서 농사를 지으려고 했을 때 주민들이 우호적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것은 착각이었습니다.”면서 “지역 정서를 파악하지 못했고 주류와 비주류로 나위어진 마을에 비주류 쪽으로 들어간 것도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라고 술회했다.

◇ ‘위기는 기회’한우 사육에 올인‘

이 씨는 주민들과 사이가 좋아져 축산을 할 수 있는 날을 기다리며 벼농사를 하면서 2007년을 당진에서 보냈다. 그러나 주민들과의 관계는 좀처럼 개선되지 않았고 폐암 진단을 받은 아버지의 병수발을 하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직후인 2008년 6월 지금의 파주에 우연히 축사를 임대하려는 사람을 알게 되어 이주하게 된다.

자신의 진로 문제 때문에 아버지가 속을 썩어 병에 걸렸다는 죄책감도 당진을 떠나고 싶은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국내 한우산업 상황은 쇠고기 수입과 한미 FTA 추진 등으로 겹시름에 빠져있는 때였다. 그러나 위기는 곧 기회였다.
그는 그때 2년 정도는 힘들고 어려운 시기일 것으로 생각하고 2년만 잘 버티면 나아지지 않겠느냐는 마음가짐으로 축산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예상보다도 빨리 송아지 시세도 오르고 고기 값도 좋아졌다. 2008년 150만원 정도였던 송아지 가격은 1년도 안돼 200~250만원으로 올랐다.
“귀농할 때 작목 선정도 중요하지만 시작시기도 중요한 것 같다”는 이 씨의 조언은 이러한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 이웃과의 원만한 관계는 영농만큼 중요

이 씨는 2008년 한우 120두와 육우 40두를 입식했다. 입식자금만 2억 5,000만원이 들어갔고 수입은 전무했다.
그는 태어난 지 3일 밖에 안 된 송아지를 입식해 분유병에 우유를 타서 먹이는 ‘초유떼기’를 했었는데 30두 중 10두는 죽었지만 가축인공수정사 자격증을 취득하면서 얻은 이론적인 지식과 현장에서의 경험을 접목시킨 유익한 체험이 되었다.
송아지에게 있어서 출생으로부터 7~10일간 제공되는 노동의 품질이 장래의 육성에 큰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그만큼 중요한 시기이며 위험한 시기이기도 하다.
파주에 와서 처음 시작한 축산 못지않게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이웃과의 친교였다. “힘만 세면 됐던 전과 달리 요즘 농촌에서 대접 받으려면 기계를 잘 다루거나 고치는 등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당진에서 겪었던 실패를 교훈 삼아 여기서는 항상 자신을 낮추고 마을의 대소사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한밤 중에 술 마시자고 전화해 오는 이웃도 생겼습니다.”
귀농도 힘든데 이웃과의 마찰로 이중 고통을 겪어야 했던 그였기에 지금 이웃과의 관계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주말에 부천 집에 가서 아내와 초등학생 아들과 딸을 만나는 그는 직원을 한 명 두고 있다.

◇ 수정란 이식기술로 5년내 한우 500두 목표

이 씨는 송아지 시세가 예상보다 좋아져 올 하반기에 송아지 30두를 첫 출하하고 2010년에는 출하 송아지를 120두로 늘릴 예정이다.
“송아지는 주식과 같습니다. 팔아야 돈이 되는 것이죠. 지금 시세가 좋더라도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라는 그의 말 속에 진폭이 너무 심한 축산물 시세에 대한 고민이 묻어나왔다.

그는 심각한 축사 환기 문제를 개선하려고 농림수산식품부의 ‘축사시설현대화사업’에 신청하려 했지만 임대해 준 주인이 사업자등록증만 있고 축산업등록증이 없어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며 실제적인 관점에서 개선을 요구했다.
이 씨는 현재 인공수정을 이용하고 있는데 앞으로 수정란 이식기술로 한우를 분만할 계획이다. 소에서 실용화되고 있는 수정란 이식은 유전적으로 우량하고 우수한 체격과 능력을 가진 암소에게 호르몬 처리 등을 통해 난자가 많이 배란하게 되어 우수한 정모우의 정액으로 수정을 시킨 후, 착상 전에 자궁에서 수정란을 회수하여 능력이 낮은 다른 암소의 자궁에 이식, 임신하게 함으로써 능력이 우수한 송아지를 일시에 많이 생산하는 기술을 말한다.
기존의 인공수정과는 달리 수정란 이식의 장점은 한번에 좋은 형질의 수정란 여러 개를 생산, 개체 수를 증가시켜 단기에 많은 가축개량 효과를 낼 수 있어 경제적이다.

이 씨는 “앞으로 5년 안에 한우 사육규모를 500두로 늘리고 축산이 인정되는 대로 원래 생각했던 버섯 재배도 시작할 계획이다”며 야심찬 포부를 피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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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농업기술센터 귀농귀촌담당(☎ 055-940-8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