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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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가적인 삶으로 귀환, 그것이 성공이 아닐까요?

작성일
2009-11-30 15:50:49
이름
농업기술센터
조회 :
962
강원도 화천군 화천읍 동촌리, 화천에서도 오지라고 소문난 이 곳은 호랑이가 나온다는 동네로 유명하다. 아직도 동촌리에는 간간이 호식총이 보이기도 한다. 호랑이에 잡혀가죽은 사람의 무덤인 호식총은 주검이 화장해 돌을 쌓아 그 위에 시루를 엎고 시구 구멍에 물레에 쓰는 쇠가락을 꽂아 놓은 것이다.
화전민들은 범의 밥이 되기를 마다않고 왜 그토록 깊은 산 속에서 살았을까? 공자가 이르기를 ‘가혹한 정치는 범보다 무섭다’했다 깊은 산속에 들어와 살던 화전민 가운데는 관리의 횡포와 과중한 세금, 부역 등에 쫓겨온 사람들이 많았다. 차라리 숙명으로 알고 범에게 잡혀 먹히더라도 묵묵히 화전을 일구며 마음의 평정을 구했고, 호식된 상황을 신성함으로 격상시켜 슬픔을 미화했다고 한다.

요즘에 호랑이가 나올리는 없지만, 그래도 호랑이가 나올 정도로 청정한 지역이 바로 동촌리이다. 맑은 공기와 수려한 산세, 손이 시릴 정도로 깨끗하고 맑은 물이 이 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탄성을 지어내게 하는 이 지역에 왜 김익환 씨(40세)는 귀농을 선택했을까?
소탈한 웃음을 지으며 그는 “꿈을 이루기 위해서지요”라고 말했다.

서울에서 알아주는 금융업계에서 고액 연봉을 받으며, 남부럽지 않는 생활을 하던 그가 귀농을 선택한 이유는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전원생활을 이루기 위해서란다. “전북 부안에서 태어나 생활을 하다 서울로 올라와 2007년까지 생활을 했습니다. 금융업계에서 만 18년 동안 근무를 했고, 성실히 근무했기 때문에 인정을 받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빨리 승진할 수 있었고, 더 많은 월급을 받았습니다. 33살에 결혼을 해 2명의 아이를 낳고 정말 뒤돌아볼 시간이 없이 앞만 보고 달린 것 같습니다.”
남들이 다 부러워할 만한 위치에 올라섰지만,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은 답답함은 지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두 아이들에게는 지금도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직장생활에 전념하다보니 아이들과 눈을 마주칠 수 있는 시간도 물론 없었구요. 과연 나의 삶이 행복한가 하는 의구심이 계속 생겼습니다. 무리한 야근과 휴식 없는 생활로 몸까지 안 좋아져서 정말 이대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고, 자연을 직접 접하며, 가족들과의 시간을 갖는 것이 제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항상 꿈꿔왔던 것이 귀농이었기 때문에 자신 있게 귀농을 결심했습니다.”

귀농 결심 후 1년간 잘 놀았습니다.

귀농을 결심하고 주위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했지만, 다들 의아해 하는 표정들이었다. “아내가 시작한 어린이집도 자리를 잡기 시작해서, 잘 운영되고 있었고, 저 또한 남부러울 것 없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들 귀농을 반대했습니다.”

그는 가족들에게 귀농에 대한 굳은 결심을 가지고 가족들을 설득하며 전국에 귀농을 해 정착한 땅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우연히 지인을 통해 알게 된 화천읍 동촌리를 가게 된 후 ‘이곳이 바로 내가 정착할 곳이다’라고 느꼈다고 한다. 귀농하기 5년 전에 땅을 구입하고, 재작년부터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귀농 결심 후 1년간 잘 놀았다고 말하지만, 집을 짓기 위해 강원도 원주에 있는 ‘흙처럼 아쉬람’에서 그는 흙집짓기 과정을 이수했다. 직접 자신의 손으로 귀농해 정착할 집을 짓기 위해서이다.

1년이 넘게 친환경 자재와 목조를 이용해 집을 짓고, 직접 수돗가를 만들고, 논밭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난방비를 절약하기 위해 그가 목재펠렛보일러를 선택했다. 강원도에서 최초로 농가에서 목재펠렛보일러를 설치해 난방용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일 년 난방비는 100만 원 정도라고 한다.
“지금은 지자체에서도 많은 지원을 해주지만 처음에 보일러를 설치했을 때는 가격도 비싸고, 고장이 많아 고생이 많았습니다. 거리도 거리이고, AS도 잘 되지 않아 전화 상담을 하며 스스로 고치다 보니, 이제 보일러 기사가 다 되었습니다. 지난해부터는 국내산 펠렛을 이용해 사용하고 있습니다. 캐나다산 펠렛에 비해 습기에 강해 보일러의 고장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귀농 첫해에는 귀농 초보자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고추, 감자, 강낭콩 등 30여 종의 작물과 함께 쥬키니 호박을 주로 심었다. 그는 처음 시작하는 농사라 바쁘기도 바빴지만,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들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귀농의 조건,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

그가 말하는 귀농의 조건은 물질적 토대의 기초이다.
“맹자(孟子)에 나오는 말이 귀농하는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다’는 말처럼 도덕적 삶도 먹고, 자고, 입는 기본적 욕구가 충족이 되어야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귀농의 경우 시작하자마자 큰 돈을 벌기는 매우 힘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귀농시 세웠던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2~3년 동안 계획을 유지할 만한 기본적인 자금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서는 필요 이상으로 넘치는 돈이 아니라 생활에 꼭 필요한 물질적 기반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맹자에 나오는 항산의 내용은 첫째, 부모를 모실 수 있는 경제적 여건이다. 둘째는 처자식과 함께 살 수 있는 물질적 토대, 셋째는 풍년이 들어도 굶어죽지 않는 정도의 물질적 기초이며, 이런 물질적 기초만 유지되면 항심을 가질 수 있다.

귀농 첫 해 수입은 1,200만원 정도였다. 서울에서 지낼 때 보다는 휠씬 적은 수입이지만, 전원생활을 하기에 부족한 돈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이 수입 중에 농사로 인해 벌어들인 수입은 400만원이며, 건설현장에서 3개월간 400만원, 개구리 양식장에 납품하는 귀뚜라미 사육으로 400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굳이 농사만을 고집해 적은 수입을 유지하기 보다는 지역에서 할 수 있는 새로운 수입원을 찾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한다.
또한 농사일을 하며 틈틈이 건설현장에서 입하는 모습이 지역주민들에게 근면하고 성실하다는 인상을 심어 주어 마을 주민들에게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었다.

귀농의 두 번째 조건은 지역 주민과의 조화이다.
그는 가족과 함께 동촌리에 귀농을 하기 전 혼자서 마을로 내려와 마을일을 돕기 시작했다. 마을에서 운영하는 홈페이지 등 컴퓨터 작업을 돕고, 소소한 마을일을 도우면서 귀농을 착실히 준비하였다. 천안연암대학 교육 과정 중에서도 현장실습을 화천군 동촌리에서 가졌다. 정착할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마을 사무장일을 하면서 지역민과의 융합을 도모했다. 또한 마을일을 도우며 농사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어떻게 보면 귀농은 무임승차하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농사를 지어온 지역 주민들이 보면 귀농을 시작한 분들은 지역민들이 가꾸어온 터전에 나중에 들어온 사람이기 때문에 지역민들을 존중하고, 의견을 따라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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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농업기술센터 귀농귀촌담당(☎ 055-940-8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