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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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농과 함께 찾아온 기회와 행복

작성일
2010-04-05 09:52:18
이름
농업기술센터
조회 :
1267
나는...

농촌에서 태어나 농사짓는 부모님을 보며 유년시절을 보냈고 농촌에 대한 어떤 매력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어른이 되어도 결코 농촌에서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었습니다. 여학교를 졸업하면서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했으며 지인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나 5년여의 교제기간을 가졌고 1978년 결혼했습니다.

새로운 출발...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했던 남편은 농촌에서 살기를 원했고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젊음을 의지로 농장(육계)을 시작했습니다. 학교 졸업 후 군에 임관했고 제대 후 곧 결혼했던 남편은 경험부족으로 번번이 적자를 면치 못했으며 출하시기를 맞추지 못해 사료 값을 대느라 늘 허덕였습니다. 생활은 늘 쪼들렸고 남편은 점점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이렇게 의욕만 앞섰지 전혀 준비가 안 되었던 상태에서 꿈만 갖고 시작했으니 힘들 수밖에... 거듭되는 시련에 결국 남편은 농촌에 대한 꿈을 접고 아이들 교육을 마칠 때까지만 도시에서 생활하자며 농촌을 떠났습니다.

그 후 용인 체대에서 스포츠 트레이너 교육과정을 이수했고 강사자격증을 취득하여 90년 체육관(헬스클럽)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88올림픽 직후여서 많은 사람들이 운동에 관심이 무척 고조되어 있었고 이에 힘입어 체육관은 날이 갈수록 관원이 늘어났으며 우리는 마음의 여유와 경제적으로도 안정이 되어갔습니다.

승용차도 새로 구입하고 중형아파트로 이사도 했으며 가까운 이웃과의 좋은 만남도 이어졌고 주말이면 가족이 함께 여행도 하며 건강하게 커가는 아이들을 보며 행복 했습니다. 그러나 농촌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남편은 늘 도시생활 속에서도 잡지나 신문에 농촌이나 귀농에 대한 기사가 실릴 때마다 스크랩하며 노후는 꼭 농사를 지으며 자연에서 살고 싶다고 누누이 말했습니다.

IMF가 가져온 변화...

큰 아이가 대학입학을 앞두고 있던 1998년 IMF가 전국을 강타했고 곧 경기하락세로 이어졌으며 체육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관원이 줄기 시작했고 때마침 각 관공서(은행, 우체국, 동사무소) 등에서 실비로 운영하는 스포츠센터가 생겨나면서 적잖은 타격이 있었습니다. 한참 돈이 많이 들어갈 시기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기구도 새로 구입했고 회비도 내렸지만 좀 더 저렴한 곳을 찾아 움직이는 이들을 잡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래도 기존 회원이 함께해주어 체육관은 운영할 수 있었지만 고민하던 끝에 남편은 체육관을 정리하고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놓았던 귀농을 결심했습니다.

이때부터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될 땅을 찾아 발품을 팔며 2년여에 걸친 여행이 아닌 여행을 다녔습니다. 그러던 중 남편은 2002년 지인과 함께 우연히 들렀던 태안에 매료되어 바닷가 땅을 사고 싶어 했습니다. 태안은 우리 부부에게 전혀 생소한 곳이고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아무런 연고도 없는 곳이었지만 남편은 지금 살고 있는 땅 1,000여 평을 계약했습니다.

‘소나무 숲이 병풍처럼 주위를 감싸고 전면에 바다가 내려다보이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며 남편은 쉽게 결정을 했지만 소심하고 무서움을 많이 타던 저는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기 보다는 겁부터 났습니다. 낯선 생활에 대한 두려움에 잠도 안 왔고 소화도 안 되어 그야말로 생병이 날 지경이었습니다.

익숙한 도시생활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그렇고 가까이 지내던 친구들과 좋은 이웃들과 멀리 떨어져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정말 무거웠습니다. 그러다 남편의 끊임없는 설득과 태안 바닷가의 아름다운 경치에 점점 매료되었고 그 당시 큰 아이는 대학 졸업 후 소위로 임관했고, 작은 아이는 대학 4년에 재학중어어서 기숙사 생활을 했고 졸업과 동시에 소위 임관을 앞두고 있어서 아이들은 크게 문제되지 않아 남편의 의견에 따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막상 마음을 먹고 찾아간 시골집은 아름다운 경치와는 달리 영 말이 아니었습니다. 담장은 금이 가 있었고, 부엌은 흙벽에 흙바닥이었습니다. 아파트 생활에 길들어져 편한 생활에 익숙한 저에게 이렇게 힘든 집에서 살아가려니 한숨만 푹푹 나왔습니다.

제가 이러한 집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에 끙끙거리며 가슴앓이를 하는 것을 눈치 챈 남편은 집수리를 하고 이사할 것을 약속 했으며 남편 혼자 힘으로 두달여에 걸쳐 집을 고치고, 칠하며, 도배까지 모두 마치고 다음해인 2003년 4월 살고 있던 아파트를 전세 놓고 귀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렇게 우리 부부는 태안에 새로운 둥지를 틀었습니다.

새소리에 눈을 뜨는 행복한 아침

아침이면 새소리에 잠이 깨었고 창문을 열면 솔향기 가득담은 상큼한 바람과 함께 파란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저녁 무렵 감나무 밑에 앉아 바라보는 낙조는 그야말로 장관이었으며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여유를 느끼며 우리는 행복했습니다. 이삿짐 정리가 거의 끝날 무렵 마을 이웃 분들을 초대해 집들이도 했습니다. 이웃 분들은 “젊은 사람들이 어려운 결정 했다”며 반가와 하셨고, 반면에 젊기 때문에 곧 떠날 수 있다며 우려하시는 분들도 계셨지만 우리 부부는 서두르지 않고 적응해 가리라 마음먹었습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불행과 희망

그러던 어느 날 이사한지 한달도 안 된 5월 15일 정말 예기치 못한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남편과 함께 나섰던 산책길에 이슬 맺힌 풀을 밟고 미끄러지면서 심한 복합골절상을 입고 구급차에 실려 인천의 대학병원에서 2번에 걸친 수술을 받았고 4개월간의 병원생활을 했습니다.

이렇게 순간의 실수로 퇴원 후에도 목발을 짚으며 생활했고 수개월동안 통원치료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생소하고 낯선 곳이어서 어설프고 힘든 상황에 몸마저 아프고 불편하니 너무도 답답하고 자신에게 화가 나서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무던하고 착한 남편은 시골에 오기 싫다는 사람 억지로 데려와서 괜한 사고가 난 것 같아 내심 미안해하며 투정하는 저를 너무도 따뜻하게 대해주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남편에게 고맙고 미안해서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하지만 그때 우리를 더욱 힘들게 했던 것은 외로움과 불편함 보다는 주위 분들의 걱정삼아 하시는 말씀들 이었습니다. “이사 잘못가서 다리를 다친 것 같다며 터가 안 좋은가 보다”라고 말씀하시는 분도 있었으니까요.. 정말 두렵고 힘든 날들이 이어졌지만 그래도 계절은 바뀌고 세월은 흘렀습니다.

다리 골절로 몸은 불편했지만 머리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평소에 생각에 그쳐 묻어두었던 자원봉사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병원치료를 받으며 태안군청 사회복지과와 자원봉사센터를 방문해 자원봉사자 등록을 마쳤고 이듬해인 2005년 3월 태안군청 민원실에서 민원안내 도우미를 시작으로 자원봉사에 참여했고 지금까지 계속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또 다른 세계로 마음을 열고 다가섰으며 새롭게 생활해야하는 태안에 대해 차츰 익숙해져 갔고 자원봉사를 통해 알게 된 많은 분들과의 좋은 만남은 또 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왔습니다.

한편 음식 만들기에 흥미와 관심이 많은 나는 직접 농사지은 콩으로 두부도 만들어 먹었고, 귀농하면서 난방비 절약과 건강을 생각하여 남편이 6개월간 손수지은 황토방에 가마솥을 걸고 장작불을 피워 삶은 콩으로 청국장도 직접 만들어 지인들과 나누어 먹게 되었습니다. 어설프지만 우리의 농촌생활은 그렇게 하루하루 이어졌고 차츰 적응이 되어갔습니다.

이사 오면서 사다 심은 과일나무(포도, 사과, 배)는 남편의 사랑과 보살핌으로 한해가 다르게 잘 자라주었고 이미 자리하고 커가던 감, 밤, 무화과 등 각종 과일나무는 가을이면 풍성한 열매를 맺어 우리를 기쁘게 했으며 훌륭한 간식거리를 선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텃밭 한켠에 꽃밭을 만들어 봉숭아, 채송화, 백일홍도 심었으며 아침에 눈을 뜨면 꽃과의 눈맞춤을 시작으로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때마침 웰빙이란 붐을 타고 많은 도시민들은 주말을 이용해 농촌으로 자연을 접하고자 찾아왔고 시골에 가면 외로워서 어쩌나 하며 지레겁먹었던 나의 생각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았습니다. 시골행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며 말리던 친구들은 ‘네 덕에 좋은 곳에 와서 편히 쉴 수 있다’며 도시에 살 때 보다 오히려 더 잦은 만남을 갖게 되었고 일주일 내내 손님이 함께 지낸 날도 있을 정도로 우리 집에는 항상 온기가 가득했습니다.

기회가 찾아오다!

이렇게 2년여를 지낸 어느 날 왠지 허탈함을 느끼며 무언가를 해보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할 즈음 가까운 지인께서 무료하지 않게 좀 더 빨리 농촌생활에 익숙해지기 위해 각종 정보를 얻을 수 있고 좋은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 농업기술센터를 방문해 보라고 권유하셨습니다.

몇 번의 망설임 끝에 조심스럽게 농업기술센터를 찾았고 반갑게 맞아주시는 선생님들을 통해 여러 가지 좋은 교육프로그램이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또한 제가 정말 필요로 했던 정보가 담긴 책자도 많이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좀 더 일찍 농업기술센터를 찾아왔더라면.. 그러지 못했던 것이 정말 아쉬웠습니다.

그렇게 농업기술센터와 인연을 맺고 시간이 되는대로 필요한 교육을 받았으며 겨울에는 새해영농설계교육에 부부가 함께 참석하여 보다 내실 있고 행복한 귀농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고민하며 차근차근 준비했습니다.

초보 부부 농사꾼

이렇게 교육을 통해 무언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던 우리 부부는 큰 결심을 하였습니다. 전세 놓았던 도시의 아파트를 정리하여 태안에 새로운 농토를 구입했고 이때부터 우리 부부는 함께 교육을 받으며 초보 농사꾼으로 다시 태어나기로 했습니다.

2,000여 평의 땅에 벼농사도 짓고 콩도 심었지만 농사를 지어보지 않았던 우리 부부는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었고 농사지은 수확물은 언제나 수고에 비해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때마다 남편을 향해 농사일에 힘만 든다며 불평도 여러 번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묵묵히 농사를 지었고 저는 수확한 콩으로 메주를 쑤어 담근 된장, 간장과 건강을 생각해 만들어 먹던 청국장을 지인들의 요구로 판매도 하게 되었습니다.

TV속에 내 모습이~

2006년 12월에는 태안군청 농림과 추천으로 KBS 6시 내고향 [귀촌일기(아름다운 삶)]편에 우리 부부의 살아가는 모습이 방영되었으며, 2007년 11월에는 KBS 2TV 세상의 아침[고향의 맛을 찾아서]프로에 다시 한번 제 모습이 방영이 되었습니다.

방송이 나가서 인지..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이들의 발걸음이 잦아졌으며 늘 손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변화로 남편은 조용히 농사지으며 살고 싶어 시골로 왔더니 세상이 밖으로 불러낸다고 가끔씩 투덜대지만 내심 싫지만은 않은가 봅니다.

교육을 통해 새로운 삶을 찾아가다~

농업기술센터와의 인연은 계속되어 농업기술센터에서 운영하는 농업인대학[농촌관광과정]을 받으며 농촌관광에 대한 꿈을 키워갔고, 충남농업기술원에서 운영한 농촌여성평생학습 [농촌관광리더반]교육도 받았습니다.

농촌관광리더반 교육 수료생중 성적우수자에게 부상으로 주어지는 유럽연수의 기회를 얻어 앞서가는 유럽 선진국의 농촌을 보고 느끼고 배우는 값진 경험을 하였습니다. 이때마다 남편은 이렇게 말합니다. 옛말에 어른말씀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을 얻어먹는다더니 당신은 남편 말 듣고 태안으로 이사 와서 유럽여행도 다녀오고 방송에도 나왔으니 출세했다고 말입니다. 맞습니다. 도시에 살았더라면 언감생심 꿈이나 꿀 수 있었겠습니까~

그동안 취미삼아 해왔던 천염염색이 지난 4월 전원생활[전원에 살다] 코너에 실리면서 저는 좀더 본격적으로 염색에 빠지게 되었고 요즘은 염색하는 재미에 푹 빠져 시간이 날 때마다 무언가를 주무르고 만지며 아름다운 자연색에 매료되어 꽃과 열매, 줄기, 뿌리 등 주위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식물이 염료로 보이기 시작했고 새로운 도전을 시도해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부응하려면 우리의 사고가 바뀌어야 하듯 우리의 농촌도 변해야 합니다. 오직 농사만이 아닌 또 많은 변화를 추구하며 지금까지의 삶에서 맺어졌던 좋은 사람들을 떠올렸고 그동안 받아왔던 교육을 디딤돌로 삼아 나의 열정과 잠재력을 깨울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올해 초 용기를 내어 농업기술센터에 농가지원사업신청서와 사업계획서를 제출하고 긴 기다림 끝에 지난 4월 농업기술센터의 지원을 받아 농가 체험장으로 새롭게 발걸음을 시작했습니다.

지난 5월에는 미처 체험장 시설도 갖추지 못한 상태로 천막을 치고 그동안 배우며 익혀왔던 모든 것을 총동원해서 2번의 단체체험도 진행했으며 그 후로도 여러 번의 체험이 있었습니다.
이에 우리 부부는 좀 더 참신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체험장을 운영하기 위해 오늘도 고민하며 함께 노력해가자고 서로에게 다짐해봅니다.

흔히 교육을 콩나물 시루 물주기에 비유합니다. 한 바가지씩 흘리듯 부어주는 물을 먹으며 콩나물이 자라듯 제가 열심히 받아왔던 교육들이 든든한 밑거름이 되어 앞으로의 생활에 큰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귀농인이기 때문에 어려움도 많지만 나는 귀농인 이기에 기회도 많다고 믿고 난관을 극복하며 목표를 향해 매진해 나갈 것입니다.

지금까지 귀농이 활성화되지 않았고 준비도 미비했던 나는 어려움을 많이 겪었습니다. 귀농을 준비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제가 경험했던 것들 중 몇 가지 알려드리고 싶습니다.

첫째, 귀농하시기 전에 귀농과 관련된 여러 정보를 습득하시길 권해드립니다.
● 추천 사이트 : 귀농운동본부(www.refarm.org)
둘째, 귀농은 단지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전문기술을 습득하여 생활(경제)에도 보탬이 될 수 있는 일을 갖기를 권합니다. 이를 위해 자격증 취득 등 풍부한 경험을 쌓았으면 합니다.
셋째, 작지만 나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도움을 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랑과 베품의 마음을 가졌으면 합니다.
넷째, 마을 주민과의 원만한 인간관계도 중요하지만 관공서와의 협조와 유대관계 또한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언젠가 기회가 온다고 생각하기에 먼 훗날! 앞서가는 충남으로 귀농을 결심했음이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말할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내딛으렵니다.
오늘도 난 여유 있고 멋진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하며 꿈을 향해 다가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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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농업기술센터 귀농귀촌담당(☎ 055-940-8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