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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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촌생활을 하며..

작성일
2010-04-12 15:37:34
이름
농업기술센터
조회 :
1471
꿈에나 생각했던 귀촌생활을 시작하면서 겪었던 일들을 적어 올릴까 합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면 제일 먼저 말을 배우는데 그중에 제일 먼저 하는 말이 엄마, 아빠를 부르지요. 그러나 저는 아빠소리를 한번도 부르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답니다. 저희 집은 칠남매로 아들 셋과 딸이 넷이지요. 그중에 저는 막내입니다.

아버지께서 세상을 일찍 돌아가신 까닭에 저는 어머님과 생활하다 큰형님이 결혼하여 모든 살림을 큰형수님께서 맡아 하시고 제가 아홉 살 되던 해 어머님께서는 저를 공부시키시겠다고 남의 집 식모살이를 하시게 되고 저는 형수님의 구박에 견디다 못해 저 역시 집을 나와 모진 타향살이가 시작되었지요.

어린나이에 친구들은 책가방과 도시락을 들고 학교에 다닐 때 저는 길거리를 방황하기도하고 여러 공장을 다녀보았지만 큰 도움이 안돼서 방황 끝에 어느 선배의 주선으로 인천 사진관에 취직을 하였지요.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저는 우리나라 제일가는 허바허바사장에 취업을 하여 명색이 어느 곳에 가도 기술의 장인이 되었습니다.

제가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니 어머님의 꿈을 이뤄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모든 삶은 고향에서 어머님 모시고 제가 이 세상 다하는 그날까지 사는 것이 큰 꿈이었지요. 그런 생각으로 열심히 살아가다 지금의 저의 처를 만나 결혼하고 월세 단칸방에서 어머님 모시고 결혼생활이 시작되지요. 그러나 오랜 세월 수절하면서 저희만 바라보며 생활하신 어머님은 저의 결혼생활에 엄청난 난관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저희는 첫 아들을 낳았습니다. 식구는 늘고 월급은 적고 너무나 힘든 생활 끝에 저는 사표를 내고 어느 은인의 도움으로 사진관을 개업하였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힘든 나머지 과로로 인하여 제가 폐결핵에 걸려 여러 해 고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저앉을 수 없다는 생각에 제가 할 수 있는 힘과 지혜를 다하여 낮밤을 새가며 노력한 결과 영업이 너무나 잘되어가고 둘째아들도 낳고 생활형편이 날로 좋아지기에 고향 가는 길은 바로 이때다 하고 시골에 땅을 장만하고 어머님과 아들과 처, 우리는 마음이 너무 벅찼지요.

이 모든 것은 어머님께서 여러모로 보살펴 주신 덕분으로 생각하고 아이들만 빨리 성장하면 그동안 자식들 위해 고생만 하신 어머님 모시고 시골 내려가 편안히 여생을 모시리라 생각하였는데 이게 왠일인지요. 어머님께서는 치매가 오고 말았습니다. 어머님의 치매는 더욱 심해지고 형제들은 어머님을 모시라고 할까봐 모두 외면하고 저희역시 엄청난 입원비를 감당 못하고 아들들과 교대로 어머님을 보살피던 중 큰아들이 군에 입대하고 둘째 아들까지 군입대를 하고나니 저희 부부는 그야말로 가게보랴 어머님 보살피랴 너무나 힘든 생활의 연속 이였지요.

이, 삼년이 지나 아들들이 제대하고 가족회의 끝에 어머님과 저희 부부는 귀촌을 결정하고 큰아들의 결혼을 서둘러 시키고 30년을 운영해오던 사진관을 큰아들과 며느리에게 맡기고 몽산리에 계신 할아버지, 할머님들의 영정사진을 촬영해 드리면서 이사준비를 했지요. 하필 이사 내려오는 날 태풍이 몰아치고 의지할 집하나 준비도 않된 상황에 콘테이너 박스에 저희 세 식구 몸을 의지하고 하루하루를 보내면서 어머님을 편히 모시기 위하여 집을 지을 중장비가 들어서고 두 달여간의 노력 끝에 집이 완성되고 동네 분들을 모시고 집들이 겸 인사를 올렸습니다.

때마침 저희에게 동민일동의 감사패가 전해지며, 저희의 귀촌을 모두 환영해 주셨습니다. 우리 밭에는 소나무를 심고 소나무 밭에는 토종닭과 천둥오리를 기르며 ‘솔농원’이라는 간판을 걸고 남의 땅을 얻어 생전 농사하고는 거리가 멀다 생각하고 살다 막상 논농사와 밭농사를 지으려니까 그야말로 너무나 모르는 것이 많아 동네 분들을 찾아 뵙고 상의 드리고 동네 분들의 자문을 들으며 무, 배추, 고추들을 키우며 도시에 있는 양로원과 고아원에 김장때면 땀 흘려 가꾼 배추와 무를 여러 차례 보내는 보람도 있었습니다.

저희는 큰 수입이 없는 상황에 기름값이 너무나 올라 어머님을 따뜻하게 모시기 어려워 장작보일러와 화덕을 설치 하고나니 이장님과 동네 분들이 나무를 많이 주선해 주시어 겨울이면 어머님을 따뜻하게 보살 필수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들과 며느리가 아버님, 어머님의 성공적인 귀촌생활이라며 ‘6시 내고향’에 신청하여 2008년 3월 25일에 방영되었지요. 방영되는 다음날 어머님께서 골절로 자리에 눕게 되어 치매 23년의 세월과 여러 날 고생하시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시고 7월 10일 하늘나라로 가셨답니다. 어머님은 고인이 되셨지만 동네에 연로 하신 분들과 저희 귀촌생활에 아낌없이 도움을 주시는 분들과 함께 열심히 생활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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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농업기술센터 귀농귀촌담당(☎ 055-940-8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