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게시판

  • 페이스북 담기
  • 트위터 담기
  • 구글플러스 담기
  • 링크 주소 복사
  • 본문 인쇄
  • 글자 확대
  • 글자 축소

찾아가는 농업에서 찾아오는 농업으로

작성일
2010-04-19 15:23:23
이름
농업기술센터
조회 :
1201
저는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시절에 서울로 유학 보내졌고 대학까지 서천과 서울을 왕래하면서 공부를 하며 학창시절을 보냈습니다. 원예학을 전공하고 약 2년간의 원예 시험장에서 근무를 한 뒤 81년 충남 서천의 아리랑농장에 귀향하였고, 오늘까지 줄 곧 그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젊은 동지 2명과 함께 귀농하면서 학교에서 배운 지식과 연구소의 경험으로 곧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농업과 농촌에 대한 큰 기대와 자신감으로 농사일을 시작하였습니다. 선친께서는 일찍이 육종가로서, 십자화과 채소인 배추, 무 등의 품종을 개발, 채종하셨고 저의 몫도 이러한 일들을 계승하는 것이었습니다.
농촌에서 한해 두해 생활하면서 나의 처음 계획은 산산조각이 나 버렸습니다.
같이 왔던 동지들은 일년도 못되어 돌아가 버렸고, 나는 농촌의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한다면 농촌이 너무도 꿈이 없는 곳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저의 농사는 밭농사가 주였는데 일년 결산을 해보면 노력 비와 이자도 감당하기 어려워 부채만 늘어가는 식이었습니다. 농촌의 젊은이들이 왜 도시로 도시로만 가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문제는 경제에 있었습니다. 이 문제는 현장에 있는 자신이 해결해야지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하여 강한 도전을 받게 되었고, “희망 있는 농촌”을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농촌을 떠나 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농촌과 농업을 사랑하였고 농업이 우리 생명의 최후의 보루라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농촌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이 땅이 세계의 중심지”라는 꿈이 가슴속에서 꿈틀거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웃에 사는 선배 형님 댁에 ‘명농당’이란 간판을 걸고 3명의 농사 신출라기들이 모여 농촌을 이야기했습니다. 한 명은 법대를 졸업하고 고시를 준비중인 동네 10년 선배 이였고, 또 한 명은 신학교를 갓 졸업하고 목사를 지망하는 동네 8년 후배였습니다.
그러기를 수년간.....
우리들은 3가지의 결론을 얻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고품질의 농산물을 생산하여 도시의 소비자와 직거래를 하는 것이고, 둘째는, 농산물을 가공하여 가공품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며, 셋째는, 이러한 것들을 최종 가공인 음식으로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었습니다.
배가 아프면 아이를 낳는다는 옛말처럼 드디어 삼총사는 모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87년 농협으로부터 500만원을 차입하여 트럭과 농자재를 사고 “열린이웃”이란 이름을 걸고 소비자 가정으로 직접 배달하여 얼굴을 맞대는 직거래를 시작하게 된 것이죠.
서울의 강남지역 아파트 50여 가구를 상대로 시작된 직거래는 우여곡절의 숫한 사연을 남기면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는 서울 송암교회와 김장철의 계절 직거래로 일년에 3000만원 정도의 판매고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경과를 거치며 제 마음속에 정리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농산물을 도시의 소비자한테로 직배하는 것보다는 도시의 소비자가 농촌을 직접 찾아오게 하는 “찾아오는 농업”을 해야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벌들이 꿀과 화분을 따러 꽃을 찾아가듯 소비자들이 찾아오는 농촌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소비자들이 찾아오는 농촌을 생각하며 동백축제를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아리랑 농장은 마을 한가운데 작은 동산에 자리하였는데, 60년대 초에 심겨진 동백나무와 여러 수종의 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러나 제대로 가꾸질 못하여 겨울철을 제외하고 잡초와 칡들이 우거져 다니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봄철이 되면 동백꽃이 피는 동백동산이 되곤 했습니다.

이런 곳을 한쪽씩 정리하고 멋대로 우거진 나무들을 재배치하면서 동백축제를 계획하였습니다. 동백꽃은 춥고 움추러 들었던 겨울이 채 가기도 전부터 피기 시작하여 4월 초순이면 만발하였습니다. 맨 먼저 봄의 소식을 알리는 꽃이었지요. 그래서 동백꽃과 조화를 이루는 목련, 수선화를 조성하며 봄소식을 알리는 꽃동산으로 만들기로 조경을 계획하고 조금씩 조금씩 조성해 갔습니다.

동백축제는 맘껏 핀 봄의 ‘꽃동산에서 음악회를 열며’, ‘토종음식과 환경농산물을 나누며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지고’, ‘도시와 농촌이 만나 생명의 삶과 행복을 있게 하는 곳’을 만들자는 계획이었습니다.

수년간에 걸쳐 준비하며 드디어 96년 4월 18일 제 1회 동백축제를 개최하게 되었습니다. 농사일만 하다가 이런 행사를 하려고 보니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음식 준비에서부터 무대준비, 주변환경조성, 조명 음향시설, 상품준비, 프로그램의 섭외, 진행 등 그야말로 종합예술 이였습니다. 1회 동백축제는 성공적으로 끝이 났습니다. 작은 음악회도 잘 되었고, 한번 왔던 사람이 다섯 번이나 다른 사람을 데리고 온 경우도 있었습니다. 8일간에 걸쳐 행사를 마치니 온 식구들이 모두 파김치가 되어 있었습니다. 수지도 적자였고, 모든 식구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년에는 아예 하지 말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별로 군살이 없는 편이지만 동백축제 이후에 체중이 2kg이나 줄었습니다. 어머님과 누이들이 이러다간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하며 모두들 다음 동백축제를 반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족 모두는 동백축제에 대하여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번 꽃에서 재미를 보고간 꿀벌은 반드시 그 꽃을 찾아오는 법 ”다음해 겨울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또는 전화로 동백축제에 대한 문의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동백축제를 하는가?“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이러한 물음은 우리들의 마음에 다시 ‘찾아오는 농업’에 대한 불을 지폈고, 동백축제는 올해까지 여섯 번째가 되었습니다.

4월이 되어 동백축제가 시작될 즈음엔 마을 분들도 제법 도와주고, 각지로 흩어져 사는 친척절도 모두 함께 참여하여 재정 부담도 나누어 하고, 준비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해가 갈수록 정리되어 가는 동백동산과 찾아오는 손님을 보면서 마을 사람들은 ‘찾아오는 농업’에 대한 농촌의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만족도 조사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평가

담당부서
농업기술센터 귀농귀촌담당(☎ 055-940-8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