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농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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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바다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살기 좋은 만세 보령에서...

작성일
2010-04-26 11:35:40
이름
농업기술센터
조회 :
2428
1. 귀농의 동기 및 과정

나는 산과 바다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살기 좋은 만세 보령에서 6남3녀 중 3남으로 태어나 여러 형제들과 함께 양보와 배려를 중시하는 대가족의 생활 형태로 살아왔다.

아버지는 농업과 수산업을 겸하는 전형적인 농어촌의 형태로 생활을 영위하여 왔으며, 모든 일에 정직과 성실로 임하라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이로 인하여 나는 어린 시절부터 농사짓는 것을 보고 조금씩 일손을 돕는 형태로 농촌을 체험하였다.

군대 제대 후 지방공무원에 입문하여 충남도청과 보령시청 등에서 15년간 근무한 후 공직을 그만두고 서울에서 노래방. 헬스클럽 등 자영업을 해왔으나 형편만 되면 고향에 내려가서 농사지으며 자연과 함께 살리라하는 마음을 항상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문제 특히 자녀교육문제, 경제적 여건 등 때문에 귀농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기기란 그리 쉽지 않은 일이다.

나의 부인도 시골에 내려가 사는 것을 원치 않았고, 또한 두 아들도 성장 과정에 있었다, 더욱이 농촌에서 살기란 마음 편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건강한 생활은 할 수 있지만 소득이 적고, 육체적인 노동이 수반되는 관계로 여유자금 없는 귀농생활이란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이가 50대 초반인 나로서는 한창 왕성하게 일할 나이인데 너무 안주하지 않나 하는 느낌을 주위에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자영업을 계속하여 오던 중, IMF 사태 이후 영업은 점점 되지 않고, 두 아들이 점차 성장함에 따라 귀농의 꿈을 실현하기로 마음먹었다

큰아들은 군대 제대 후 직장잡고, 결혼까지 하였고, 둘째아들은 홍성에 있는 대학에 넣었다 이것이 나의 귀농의 사전포석인 셈이다. 2005년에 귀향을 결심하고, 서울에서 운영하던 자영업을 모두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곳 대천에 내려와 해변을 낀 어촌과 산에 둘러쌓인 농촌 두곳을 염두에 두고 장소를 물색하던 중 지금 살고 있는 이곳에 농지와 집이 함께 부동산 시장에 나와 있어 이곳을 구입하였다. 그 이유는 해변가는 부동산 값이 터무니없이 비쌀 뿐 아니라 수입원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2006년초 집수리를 마친 후 3월에 이곳으로 이사하였다. 이사할 때에도 집사람은 시골에 내려가 살기 싫다고 끝까지 반대하였고, 온갖 설득 끝에 같이 내려오기로 하였지만, 설득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내가 귀농을 결심하게 된 것은 단지 자영업이 잘 안되어서만은 아니다. 그동안 도시 생활에서 느꼈듯이 항상 경쟁심리 속에서 불안, 초조, 긴장 등의 스트레스와 인간냄새라고는 도무지 찾아 볼 수 없는 도시의 각박한 인심, 밤과 낮이 뒤 바뀐 생활에서 오는 건강상의 문제도 함께 작용하였다.

이곳의 농토는 논이 1000여평, 밭이 200평이고, 가옥은 15년 정도 된 2층의 낡은 양옥집이다.

이러한 정도면 혼자서 농사짓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생각되었다.

2. 나의 농사체험

2006년 3월1일에 이곳에 이사하여 우선 밭에 심을 야채들을 선정하여 농기계가 없는 관계로 쇠스랑과 삽을 이용하여 밭을 일구며 두둑과 골을 만들었다. 농사경험과 육체노동을 별로 해보지 않은 나로서는 힘겨웠지만 나름대로 마음만은 편하고 즐거웠다.

우선 텃밭에 상추, 쑥갓, 아욱 등을 심고, 싹이 발아하여 떡잎에 두잎, 네잎 나올때 마다 그렇게 신기하고 , 좋을 수가 없었다. 거기에 토마토, 가지, 호박, 감자, 마늘, 고추 등 조금씩 야채백화점식으로 농사를 지어 나갔다.

서울에서 잠자는 시간이 보통 새벽2시, 일어나는 시간이 아침 8시 정도였었다. 그러나 이곳에서는 잠자는 시간이 밤10시, 일어나는 시간이 아침 5시30분으로 생활습관도 바뀌게 되었다.

서울에서 가끔 어떤 일이 있어 새벽에 일어나기란 전쟁만큼 힘들고 어려웠지만 이곳에서는 자연스럽게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서 내가 심은 식물들이 얼마나 자랐나 보고 풀도 뽑고 하면 그렇게 가슴이 후련하고, 뿌듯할 수가 없다.

논농사는 1000여평에 이곳에서 알게 된 형의 도움을 받아 아끼바리라는 벼종자를 심었다. 묘판, 육묘관리, 모심기, 농약, 물관리, 비료주기, 논둑깎기 등 논농사에 경험이 별로 없는 나로서는 무척 힘든 작업중에 하나였고, 제일 큰 애로사항은 농기계가 전혀 없는 상태에서 농사를 짓다보니 논갈기, 로타리, 육묘판만들기, 모내기, 농약, 비료주기, 탈곡 등 모두 남의 손을 빌려야 하고, 비용을 지불해야 하며, 작업이 일시에 편중되어 잇는 관계로 제때에 하지 못하는 점이었다.

그렇게 2006년도 심었던 밥맛이 좋다는 아끼바리라는 벼종은 키가 크고, 도열병등 병충해에 약해 8번이나 농약을 하였다. 유기농을 생각하던 나에게는 도저히 농약을 칠 수밖에 없던 상황이었다. 다행히 결실기에 바람이 세게 불지 않아 벼가 엎치는 현상 없이 쌀 18가마라는 수확을 보았다. 그래서 논농사를 결산해 보니 미질이 좋은 관계로 가마당 18만원정도를 받을 수 있었다. 총소득이 약 300여만원인 셈이다. 거기에서 경운, 로타리, 모내기, 농약, 탈곡 등 비용을 계산해보니 150만원정도 소요되었고, 실제로는 150여만원이 실소득인 셈이다. 그러나 시골에 내려와서 처음 농사지은 관계로 팔기도 아깝고 해서 5가마만 18만원에 팔고 10여가마는 친척과 형제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밭농사는 텃밭에 야채를 가꾸어 먹는 것 이외에 이곳에서 10여 Km 떨어진 남포면 삼현리쪽에 500여평 정도 아버님 명의 밭이 있어 이곳에 이사 오기 전 그곳에 옻나무 50주, 오가피 50주, 헛개나무 50주를 심었었다. 그러나 관리부실로 남들이 염소들을 풀어 놓아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이곳을 동네사람인 조제행씨의 도움을 받아 트랙터로 갈고, 두둑을 만들어 고구마, 들깨, 검정콩(서리태)를 심었다. 이곳에서 검정콩 1가마, 들깨 1가마, 고구마 30여 포대를 수확하였다. 판로는 나에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서울에서 살 때의 지인들과 대천 시내의 선후배 친구들이 종종 우리 텃밭의 야채를 먹으러 오면서 시장시세보다 훨씬 높은 값에 사가곤 하였기 때문이다. 콩은8Kg에 8만원, 들깨 5Kg에 3만원, 고구마 한포대(20kg)에 3만원정도 받았다.

이것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나에 대한 신뢰감 때문에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귀농 2년째 2007년도에는 논농사보다는 밭농사에 치중을 두었다. 이는 남의 농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나 혼자만의 힘으로도 할 수 있거니와 작물과 같이 생각하고,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각종 야채와 감자, 고추 200주 정도를 심었다. 그리고 동네 이진우씨의 밭을 100평 빌려 양파를 심었다. 가을철에는 김장재로 배추 120포기, 무 200개 등을 심었고 고추와 벼농사 빼고는 작황이 좋은 편이었다.

귀농 3년째 2008년도에는 주 작목으로 123평짜리 논을 밭으로 일구어 고추 900주를 심었고 남의 밭을 빌려 남포 특산물인 고구마를 50여평 심었다. 남포 고구마는 당도가 높고 맛있기로 옛날부터 유명하다. 아마 토질이 황토라서 그런 것 같다.

그리고 텃밭에는 각종 야채를 심었다. 상추, 쑥갓, 케일, 아욱, 브로콜리, 대파, 재래종파, 마늘, 생강, 땅콩, 참나물, 부추, 취나물, 오이, 참외, 호박, 감자, 토마토, 가지, 들깨, 덩굴콩, 강낭콩 들 우리집엔 없는 것이 없고, 동네사람들이 우리집에 와서 상추, 쑥갓, 아욱등은 얻어다 먹는 실정이다.

내가 운동을 지도하고 있는 남포면 봉덕리. 장세헌씨는 논농사와 더불어 밭에 특수작물을 많이 하는 사람이다. 이친구와 사귀면서 더덕, 도라지 등도 심고, 농사기술도 배우게 되었다.

나의 아내는 작년까지만 해도 농사일에 흥미도 없고, 시큰둥한 눈치였지만 올해에는 달라졌다. 밭에 나가 풀도 뽑고, 내가 길러오던 화분과 화초에 관심을 두더니 지금은 화초가 50여종으로 늘게 되었다. 꽃과 화분을 사거나 , 얻어오고 이제는 밭작물과 화초 가꾸기에 흥미진진하고 적극적이고 열성적이 되었다.

우리집 주변에는 풍요롭다. 그동안 집 안밖에 사다 심은 유실수와 묘목들이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있다, 산수유, 매실, 석류, 복숭아, 살구, 사과, 무화과, 감, 자두 들이 그것이다 아내는 하루에도 몇 번씩 그것들을 둘러보고 신시해 하며 손님들이 올 때마다 뒤뜰로 데리고 가서 몇 개 매달린 사과, 복숭아들을 보여 주며 자랑한다.

그리고 농사외에 가축도 기르고 있다 귀농 첫해에는 토종닭20마리를 길렀다 닭장에 기르다가 추수후에는 논에 방사하여 건강하고 맛있게 키워 몸보신도 하고 손님도 대접하였다. 그러나 닭은 냄새도 많이 나고 파리가 많이 들끓고 조류 독감 등으로 인하여 귀농2년차부터는 토끼로 바꿨다. 현재 토끼는 60여 마리에 이르고,무었보다 토끼는 키우는데 예쁘고 병도 없으며 번식력이 강하고 먹이 또한 손쉽게 구할 수가 있어 아내가 재미를 느끼면서 열심히 키우고 있다. 등산이나 밖으로 출타시에는 아내는 무었보다 토끼풀을 먼저 챙긴다.

이것이 진정 인간이 자연과 더불어 사는 모습이구나 하게 된다. 이런 기쁨을 어떻게 현금과 비교 하겠는가

3. 농촌에서의 문제점과 애로사항, 해결경험

귀농하여 정착해서 살아가기란 맑은 공기, 쾌적한 환경, 각박하지 않은 인심, 여유로움. 건강 등은 좋지만 첫째는 경제 문제이다. 내가 하고 있는 논농사, 밭농사 모두 합해야 년간 소득이 몇백만원에 불과하다. 농촌에서의 소비성향은 적지만 전기료, 수도료, 전화료, 건강보험 등과 축조의금 등 매월 지출하게 되는 돈은 만만치 않다.

귀농시 그래도 농토, 집 등을 구입하고, 여유자금을 어느 정도 가지고 왔지만 계속해서 통장에서 빼어 써야 하고, 만약에 여유자금이 없거나 통장에 잔고가 없어지게 된다면 어떻게 할 것 인가, 어떻게 농촌에서 자립하여 살아갈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는 비록 나만이 아닌 모든 귀농자의 심각한 고민일 것이다.

그래서 귀농첫해에 지인으로부터 제의가 들어왔다. 신문사에서 일하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서울에서 그런 생활이 싫어 농촌에 살고자 왔다고 하며 거절하였다. 그런데 이런 제안을 다시 해왔다. 상시 출근하지 말고 관공서와 대형가게의 광고영업과 운동과 건강에 대해 많이 알고 있으니 칼럼게재만 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서울에서 헬스클럽을 수년간 운영하는 동안 많은 책을 공부하고 연세대학 사회교육원에서 건강운동강사로 일한 적이 있어 쾌히 승낙하였다. 보령신문사란 지역 주간지였는데 월 보수 100여만원에 상무직책을 주어 “건강과 운동“ 칼럼을 매주 쓰며 소량의 영업실적을 올렸다.

점점 어려워지는 경제 때문에 영업실적이 저조하여 컬럼만 쓰며 월급을 받기란 미안하여 1년만에 그만 두었다. 그 후 공군수련원과 남포면사무소에서 “건강과 운동”에 대한 강의 제안 들어와 강의한 후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귀농 2년차 2007년 7월부터 보령시 남포면 주민자치센터에서 매주 3일씩 건강운동강사로 활동하면서 소정액의 수당을 받는다.

이것이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농업소득과 이 소득을 합하면 가용돈에서 최소한 마이너스는 되지 않는다.

농촌에서의 두 번째 애로는 값비싼 농기계와 농업기술이다.

트랙터. 경운기, 콤바인.등 값비싼 농기계들이다. 그리고 이 기계를 운용하려면 넓은 농토가 있어야하고 그러므로 임대료를 주고 써야 하는데 제 날짜에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요즈음은 기름값이 비싼 관계로 남의 것을 해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금년초에 농업기술센터에서 전화가 왔다. 귀농인에 대한 정부지원 사업이 있으니 참여 하겠냐고? 나는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정부에서 지원하는 사업은 서류와 각종규제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전화가 왔다. 시설하우스를 하든지 농기계를 구입해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정의 절차를 걸쳐 농기계구입(관리기외 부속기1식, 동력분부기, 고추건조기)하여 지금 사용하고 있다. 너무 편리하고 좋다. 텃밭을 쇠스랑과 삽으로 파다가 몸살이 난적도 있고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은 적도 있는데 앞으로는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것 같다.

농사기술 또한 거의 전무한 상태에서 농사를 짓자니 귀농 2년차에는 고추농사와 벼농사를 모두 실패하였다. 고추농사는 두둑에 구멍을 뚫고 살충제와 살균제를 넣고 고추를 심었으나 약해로 200주 모두 죽어 다시 심었다. 벼농사를 삼광벼를 심었으나 토양이 걸은 점, 키 큰벼 등을 고려하지 않고 비료를 많이 주어 70% 도복하여 소출의 감소를 가져왔다. 이웃에서 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 했기 때문이다. 농촌에서 오래 동안 농사지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노하우를 갖고 있다고는 하나 확실히 검증되지 않은 방법으로 매년 농사를 짓고 있다.

벼, 고추 등 시비량이나 특히 농약에 대해서는 물어도 알려 주지 않는다. 모른다기보다는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실패하면 원망을 듣기 때문이다. 즉 농사경력 30년이라 하여도 경력이 30년이 아니라 30회 농사를 반복적으로 지었다는 말이다. 경력이란 그동안 이력 즉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축적된 노하우가 있어야 비로소 경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보령시에서 주관하는 각종 농업기술교육을 받았다.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금년은 귀농 3년차이다 농업기술센터의 문턱 닳도록 드나들고 있다.

농업기술교육은 물론 유용미생물(EM) 활용기술에 대하여 3~4월 두달 동안 교육을 받고 활용 중에 있다. 보령농업기술센터 최기찬 소장님은 EM에 대해 광적인 것 같다. 교육내용이 깊이 있고 심도 있으나 나는 그나마 쉽게 소화할 수 있었다 . 왜냐하면 수산양식기술이 있고 수산미생물에 대해서도, 인체(건강분야)에 대해서도 용어나 이치를 잘 알기 때문이다.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생소한 농업용어도 많이 알게 되었다.

작물이 병없이 싱싱하게 상품화하게 자라려면 비료도 농약도 아닌 “땅의 힘” 이라는 것을, 오늘도 땅의 힘을 증진시키기 위해 열심히 EM을 뿌리면서 나름대로 땅과 작물에 대해 활용법을 연구하고 있다.

귀농3년차인 금년에는 고추재배를 주 작목으로 선택하고 논123평 자리를 밭으로 만들어 고추900주(일반고추700. 청량고추200)를 심었다. 고추묘는 일반농가에서 키운 묘를 구입하여 심었는데 청량 고추는 처음부터 시들시들 말라죽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하여 죽고 있다 일반 고추는 건강한 상태로 자라 마음에 위안을 갖고 있었으나 그것마저도 하나씩 둘씩 죽기 시작하여 수십여주가 말라 죽었다.

이것을 치료하기 위하여 말라 죽은 고추를 가지고 농업기술센터. 농약사등을 찾아다니며 원인과 치료법을 알게 되었다. 청량 고추는 고추묘에 역병균이 감염된 채로 구입하여 심은 것이고 일반 고추는 파팜나방과 역병이었다. 청량고추와 일반고추의 구입농가가 다른데 역병은 청량고추구입농가에서 감염되어 번지는 것이고 파팜나방은 고추순 잡아 줄때 침투한 것으로 보인다. 치료 방법으로 여러 가지를 시도하여 파팜나방은 치료되었으나 역병은 치료되지 않고 있다. 현재는 고추가 붉게 익어 가고 있다.

그러나 계속해서 죽어가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과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앞으로 고추묘의 선택을 잘해야 할 것이며 순 잡아준 후에는 반드시 방제를 하여야 할 것으로 사료된다.

4. 농촌에서의 사회생활

귀농하고자 하는 사람은 몇 가지 유형으로 생각 볼 수 있다. 치열한 경쟁과 각박한 인심의 도시생활을 떠나 농촌에서 자연과 더불어 너그러움과 여유를 가지고 건강한 삶을 영위하기위해 찾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나도 이런 이유에서 귀농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전원생활이 마치 자신의 생각처럼 여유 있고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농촌생활이 치열하고 현실적일지 모른다.

도시에서 농사지으려 왔다하면 마을사람들은 좋은 눈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생활습관, 문화, 생각하는 것이 많이 다르기 때문이다.

농촌에서는 여유롭고, 너그럽고, 비타산적이기 때문에 도시인의 그 정반대의 성격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또한 도시에서는 각자의 직업, 직장 등으로 독자적으로 살아 갈수 있지만 농촌의 생활은 공동체이고 협동적이기 때문에 혼자서 일하고 생활하기란 돈 많이 갖고 와서 쓰기만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농업의 형태가 계절적으로 일시에 편중되어있고 작업도 공동으로 해야 할 부분이 많으며 더욱이 노령인구가 거의 대부분이기 때문에 서로 협동하지 않으면 어울리기 힘들다. 그래서 는 이사 오던 해에 마을 청년회와 대동회에 가입하였다. 가입회비와 더불어 적당히 찬조금도 내었더니 금새 좋은 반응이 왔다.

이 동네에는 두 명의 친구와 몇 명의 학교 동문들이 있어 접근하기에 좋았다. 고향동네에 오래 있다 귀향해도 타인 취급받기는 마찬가지다. 전에는 전통적으로 애경사가 나면 마을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일을 치루어 주었지만 평소에 고향에 얼굴도 안 내밀던 사람이 애경사에만 고향사람에게 짐 지워 준다면 누가 환영 하겠는가?

또한 농촌에 일할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동네도 80여호 되지만 60세 미만의 농업인은 손꼽을 정도이다 앞으로 10년만 가도 크나큰 농촌문제가 되리라 생각한다.

나는 이 마을에 이사 와서 큰 아들을 결혼시켰다 예식은 서울에서 하였지만 피로연은 전날 마을회관에서 동네잔치 형태로 베풀었다. 주민들의 반응은 참 좋았다. 여기에 와서 애경사에 몇 번 참석하지 않았지만 예식장에 가는 관광버스에 마을주민 30여명이 참석하여 주었다. 참 고마운 일이다.

그리고 우리 동네에는 찜질방이 있다. 시청에서 지어 주었고 동네에서 자체 운영한다. 한달 회비가 일만원이고 우리 부부모두 회원이다. 우리가 제일 막내인 것 같다. 그래도 동네 어른들과 대화도 나누고 음료수, 커피 등으로 가지고 가서 대접도 한다. 처음엔 외면하던 마을 주민들이 지금은 먼저 인사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 속에서 엉클어져 즐겁게 살아야 한다. 돈 많이 갖고 와서 독자적으로 살아간다면 몰라도 귀농하려면 그 지역 현지인과 잘 호흡하며 살면 훨씬 더 나은 삶을 영위할 수 있을 것이다.

농사짓는데 있어서도 혼자 농기계를 다 구입하여 농사짓기란 불가능하다. 막대한 자금. 농기계 사용기술. 농토 등이 있어야 한다.

각 마을마다 경운기, 트랙터, 이양기, 콤바인을 가진 사람은 몇 명씩 있다. 이 사람들이 그 동네일을 분담하고 있다. 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면 동네사람과 유대는 물론 그들과의 이웃관계에서 도시에서는 맛볼 수 없는 훈훈한 정과 여유로움을 맛볼 수 있다. 나는 마침 이웃에 농기계를 모두 갖추고 농사를 많이 짓는 조제행씨, 마을 반장을 오래한 근면한 이진우씨, 남포면 바르게살기 위원장과 동네 노인회장을 지낸 장흥대씨가 이웃에 살고 있어 농토도 갈고 주고 농사법도 배우고 있다.

귀농 첫해에 고추 백주를 심었는데 밖에 출타했다 돌아와 보니 노인회장님께서 우리 고추밭에 농약을 하고 계셨다. 농약 할 시기가 되었는데 하지 않아 회장님밭에 한 후 우리 밭에도 해 주시고 계신 것이었다. 그리고 농약하는 법도 친절히 알려주셨다. 도심에서 찿아 볼 수 없는 참으로 훈훈한 인정인 것이다. 참 고마웠다.

그 후 감나무등은 공동방제를 하고 있다.

5. 앞으로의 전망

현재 농촌은 가장 어려운 국면에 직면해있다. FTA다, 쇠고기협상이다, 값싼 중국산 수입에다 가파른 유가상승으로 가장 열악한 위치에 있는 농업은 비료, 농약, 농기계, 농자재, 농업용 유류값등 폭등하고 있지만 농산물 값은 제자리 내지는 하락하고 있다. 더구나 농촌인구의 고령화는 농촌의 심각성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나 위기가 곧 기회이다. 2,3차 산업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된 1차 산업은 먹는 것이 곧 원초적인 것이고 삶의 질을 향상하는 가장 좋은 업종이다. 공업화와 도시화로 의생활, 주생활은 향상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식생활이다. 흙도 땅힘이 있어야 작물이 튼튼하게 잘 자라는 것이고 인간도 먹을 것을 잘 먹어야 건강하고 모든일을 능동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의학은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건강한 식생활이 없으면 한계가 있다.

현대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가 말했듯이 “먹는 것으로 병을 고치지 못하면 의학으로도 불가능하다”.

과거 배고픈 시절에는 증산에만 힘을 쏟았다. 이제는 양보다 질이다. 좋은 제품만 생산하면 아무리 외국산이 밀려온다 해도 경쟁력이 있고 외국에도 수출할 수 있다.

앞으로 머지않아 곡물전쟁이 온다고 생각한다. 가파른 유가상승과 국제 곡물가의 상승은 곡물자급도가 28%에 달하는 우리나라로서는 어쩔 수 없다.

또한 품질이 좋은 농산물은 값도 비싸고 잘 팔린다. 그만큼 삶의 질도 향상 되었다는 얘기다. 요즈음 농촌에서도 우리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농사짓고 있지만 비료도 덜 주고 농약도 안준 그런 농산물을 생산하여 자기 자식들에게만 주고 시장에 팔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정성들여 지은 농산물이나 양산위주의 농산물이나 값은 같기 때문이다.

현재는 소비자가 국산이냐, 중국산이냐를 놓고 물건을 고르지만 앞으로는 질 좋은 농산물을 고르게 될 것이다. 성분의 함량이라든지 농약의 검출 여부등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계기도 곧 나오리라 본다. 질 좋은 제품이야 말로 충분히 가격의 경쟁력이 있고 열심히 연구하고 땀 흘려 일하는 나 같은 농민은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귀농인은 대체적으로 전통적인 농민보다는 농업기술 경험은 적지만 지식인들이다.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관심있게 정성을 들인다면 농토와 작물은 반드시 보상해 준다고 확신한다.

땅만큼 정직한 것이 또 없다. 나는 이곳에 와서 농촌 백화점(야채등 20여종, 유실수 20여종, 야생화등50여종)을 멋지게 차려놓고 정성을 다하고 있다. 서울 신촌에서 내려오는 손님들, 대천시내의 지인들, 우리 집에 오면 하품치며 네가 언제 이렇게 농사꾼이 되었냐고 깜짝 놀란다. 나는 오늘도 새로운 소득 작목의 개발과 살아 있는 땅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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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당부서
농업기술센터 귀농귀촌담당(☎ 055-940-81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