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개요

  • 페이스북 담기
  • 트위터 담기
  • 구글플러스 담기
  • 링크 주소 복사
  • 본문 인쇄
  • 글자 확대
  • 글자 축소
  • 1951년 2월 9일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에서 주민 84명 학살
  • 2월 10일 대현리 탄량골에서 주민 100명 학살
  • 2월 11일 과정리 박산골에서 주민 517명 학살
  • 2월 9일 ~ 2월 11일 기타지역에서 주민 18명학살 등

『일부 미련한 국군』에 의해 719명이 학살된 거창양민학살사건은

15세 이하 남녀 어린이가 359명, 16세 ~ 60세가 300명, 60세 이상 노인이 60명(남자 327명, 여자 392명), 무고한 양민 719여명이 당시 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 9연대(연대장 오익경 대령), 3대대(대대장 한동석 소령) 병력의 총검에 무지막지하게 학살되어, 처참한 시신위에 마른 나무와 기름을 뿌려 불로 태워 버리기까지한 천인공노할 사건을 저질러 놓고 후한에 두려움을 느낀 한동석은 신원면 일원에 계엄령을 내려, 이방인 출입을 막고, 어린이 시체는 골라내어 학살 현장에서 약 2㎞ 떨어진 홍동골 계곡으로 옮겨 암매장하여 은폐를 하고, 공비와 전투를 하여 희생자가 발생된 것으로 왜곡을 하였으나,

1951년 3월 29일 거창 출신 신중목 국회의원에 의해 국회에 폭로되고, 1951년 3월 30일 국회와 내무·법무·국방부의 합동진상조사단이 구성되어 1951년 4월 7일 합동진상 조사단이 신원면 사건 현장으로 오던 중 길 안내를 맡은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은 신성모 국방 장관과 사전에 모의하여 9연대 정보 참모 최영두 소령의 수색 소대로 하여금 군인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거창읍에서 신원면으로 통하는 험준한 계곡의 길목인 수영더미재에서 합동진상조사단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해 조사를 못하고 되돌아 가게 하는 등 국방의 의무를 진 군인으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만행에 대하여,


1951년 7월 27일 사건발생 5개월여만에 대구고등군법회의는

「재판장에 강영훈 준장, 심판관에 정진환 준장, 이용문 대령, 법무관에 이운기 중령, 검찰관에 김태청 중령, 김부남 소령, 김동수 대위」로 심판부를 구성하여,

1951년 12월 15일 구형공판에 이어 동년 12월 16일 판정판시에서 9연대장 오익경 대령 무기징역(구형 사형), 3대대장 한동석 소령 징역 10년(구형 사형), 소대장 이종대 소위 무죄(구형 징역 10년),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 징역3년(구형 징역 7년)으로 관련 군지휘관에게 실형이 확정 되므로서 책임이 국가에 있는 거창양민학살사건은 희생자와 유족에 대해 잘못을 뉘우치기 는 커녕 기회만 생기면 탄압을 가했다.

1961년 5.16 군사정부는 5월 18일 유족회 간부 17명을 반국가 단체로 몰아 투옥을 시키는 등 동년 6월 25일 경남지사 최갑중은 당시 학살현장 접근이 어려워 3년여만에 유골을 가매장할 때 앙상한 뼈로서는 성별 구별을 할 수가 없어 큰뼈는 남자, 중간뼈는 여자, 작은뼈는 소아로 구분, 화장하여 517기를 합장하여 놓은 박산합동묘소에 개장 명령을 내려, 천신만고 끝에 만들어진 묘역을 파헤쳐서 유족들은 뼈가루와 흙한줌으로 조부, 조모, 부모, 형제, 자매에 유골로 대산하여 거주지 공동묘지에 개인별로 개장하라 하였으며, 위령비는 글자 한자 한자를 정으로 지워서 땅속에 파묻어 제2의 학살인 부관참시를 당한 사건이 거창 양민학살사건이다.


만족도 조사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평가

담당부서
거창사건사업소 관리담당(☎ 055-940-8513)
최종수정일
2015-02-01 09: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