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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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읍 동변리 서북쪽 못질 마을 위에 5개의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오자암’ 이라고 합니다.

옛날 아주 옛날, 이 세상에 어둠이 있고 아직도 산이며, 강이며, 들이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을 때, 이름 없는 바위 5개가 태어나서 뒹굴다가 마지막으로 현재의 모곡마을 위쪽에 나란히 자리를 잡았습니다. 5개의 바위가 자리를 잡고,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숲이 울창해지고, 잡초가 번식하게 되어 이 다섯 바위는 그 속에 파묻혀 버렸습니다. 다시 오랜 세월이 지난 이곳에 비로소 사람들이 들어와 농사를 지으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농토를 가꾸기 위하여 나무를 잘라내고 풀을 불태워 없애면서 다시 바위는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내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이 바위가 농사 짓는 것에 방해된다고 없애 버리려 했으나, 바위가 너무나 커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그대로 놓아 두었습니다.

그 뒤, 또 많은 세월이 흘러 이곳에 이사를 온 사람들 중 한양에서 벼슬을 하다가 퇴임하고 내려온 선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선비는 이 바위가 있는 이웃에 집터를 일구고 살게 되었습니다. 이 선비에게는 아주 총명한 세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 세 명의 선비 아들들은 항상 이 다섯 바위에 와서 놀았으므로 이 바위들과 곧 친해졌습니다. 이 선비의 이름은 이말정이라 하는데, 그의 시조는 당나라 사람으로서 신라에 귀화하여, 신라가 통일하는데 큰 공을 세워 연안백으로 봉함되었기에 본관을 연안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말정 역시 이 바위와 곧 친해지고 그리하여 이곳에 와서 사색하는 일도 많아졌으며, 이들 바위들과 무언의 대화를 나누는 일도 많아졌으므로 이말정은 이 바위를 잘 보호하고 아끼게 되었고, 얼마 뒤, 이말정에게 다시 두 아들이 태어나 형재를 다섯 두게 되었는데, 이 다섯 바위와 짝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때부터 이 바위를 오자암이라 이르고, 이 오자암에다 서당을 지어 많은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후에 다섯 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나라에 봉사하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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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관광과 문화예술담당(☎ 055-940-3413)